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가 꽃에서 영감을 얻었다.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노란색 해바라기로 희망을 그렸고,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는 빛의 방향에 따라 다채로운 색깔을 띠는 자연의 풍경을 수련을 통해 표현했다.
꽃은 사진작가 김예랑에게도 ‘영감의 원천’ 역할을 한다. 그는 어두운 배경 아래 장미, 작약, 해바라기 등 다양한 꽃을 카메라에 담는다. 액자에는 언제나 꽃이 담겨 있지만, 그는 사람 사는 얘기를 담았다고 했다. “사람 사는 모습을 꽃으로 표현한 것”이란다.
17일부터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멀티 페르소나’에서 공개하는 신작도 그렇다. 어떤 작품에선 꽃이 화려한 모자 뒤에 숨었고, 다른 작품에선 리본으로 포장돼 있다. 김 작가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사람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잖아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감추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죠. 스스로를 포장해 보여주고픈 욕망과 가면 뒤에 숨고 싶은 비겁함을 꽃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어요.”
왜 김 작가는 사람의 본능을 꽃에 빗댔을까. 김 작가는 “꽃의 일생이 사람의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꽃이 피고 지는 게 마치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모습을 ‘빨리감기’한 것과 비슷하지 않냐”고 그는 말했다.
화병에 꽂힌 여러 종류의 꽃을 찍은 ‘화지몽’ 연작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에선 칠흑같이 검은 배경 위로 화려한 색깔의 꽃다발이 빛처럼 떠오른다. 김 작가는 “안개꽃과 함께 있을 때 장미가 더욱 빛나듯이 꽃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빛나게 해주는 모습이 인간관계와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의 작품 중엔 희뿌연 색감의 사진도 있다. 아날로그 인화 방식인 ‘검프린트’ 방식을 이용한 작품이다. 제작 과정은 이렇다. 필름을 스캔한 뒤 감광제를 바르고 그 위에 물감을 하나하나 바른다. 색깔을 입히고 싶은 부분에 자외선을 투과시켜 물감이 스며들게 한다.
컬러 프린트처럼 물감의 색을 바꿔가며 이 과정을 네 번 반복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2주일 정도 걸린다. 사진이지만 회화, 판화와 비슷한 작업인 셈이다.
“뭘 그렇게 손 많이 가는 작업을 하냐”는 타박을 들어도, 김 작가는 검프린트 작업을 놓지 않는다. 그는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색을 입히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다. 검프린트 작품은 일부러 디지털 복사본을 저장하지 않는다. 세상에 꼭 하나뿐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김 작가가 처음부터 프로 사진작가의 길을 걸은 건 아니다. 기업을 운영하던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14년부터다. 경력은 길지 않지만, 2017년 대한민국국제포토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꽃에 빠졌던 그는 이제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유혹’이다. “제 기억 속 최초의 유혹은 ‘달콤한 것’들이에요. 사탕 하나만 줘도 그렇게 행복했죠. 하지만 ‘지금 아이들도 사탕에 만족할까’란 생각이 들었어요. 유혹의 세대 차이를 사진에 담는 작업을 곧 선보일 거예요.” 이번 전시는 11월 10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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