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떠나겠다"…자산가들 신청 급증

입력 2022-10-17 18:03   수정 2022-10-24 16:45


지난달 말 서울 강남의 A은행 회의실. 수백억원대 자산을 보유한 VVIP 고객 10여 명이 모였다. 대부분 미국 유학생 자녀를 둔 자산가들로, 투자이민에 대한 전문가 설명을 듣는 자리였다. 강연이 이어지는 2시간 동안 자산가들은 높은 집중력을 보였다.

강연이 끝나자 “영주권을 받고 투자금을 돌려받는 데까지는 얼마나 걸리냐” “영주권 취득 후 부모는 다시 한국에 들어와도 되냐” 등의 질문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미국 투자이민에 필요한 최소 금액이 두 배가량으로 늘었는데도 초고액 자산가인 상위 1%의 관심은 식지 않고 있다. 특히 자녀의 미국 취업을 염두에 두고 있는 유학생 부모 사이에서는 ‘필수조건’이 됐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투자이민 최소 금액 6억원→12억원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때 운영이 중단됐던 미국 투자이민(EB-5) 제도가 지난 5월 부활하면서 이를 신청하는 VVIP 자산가가 늘고 있다. 비행기 조종사 김모씨도 그중 한 명이다. 김씨는 8월 미국에 투자이민을 신청했다. 같은 파일럿 직무더라도 미국에서 일할 때 벌 수 있는 돈이 두 배 가까이 높기 때문이다. 외국인 신분으로 근무하면 연봉 혜택을 보기 어려워 영주권을 받기로 결정했다. 김씨는 “자녀가 생기면 자동으로 영주권자가 된다는 점과 향후 증여 시 막대한 증여세를 아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라고 봤다”며 “가장 빠르게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는 투자이민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투자이민은 미국 내 일자리를 창출하는 미국 법인에 투자하면 영주권을 주는 제도다. 이 제도는 2008년부터 시행됐으나 이민자를 노린 사기 등 각종 탈법 논란이 불거져 작년 6월 제도 연장을 위한 하원의 승인을 받지 못해 운용이 유보됐다. 미국은 EB-5 법안을 손질해 올 5월부터 다시 투자이민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법인 최소 투자금액을 90만달러에서 105만달러(약 14억6000만원)로 높인 것이다. 고용촉진지역의 최소 투자금액도 50만달러에서 80만달러로 뛰었다. 최근 급격히 상승한 환율을 적용할 때 기존에 6억원가량(고용촉진지역 기준)이던 투자금액이 12억원 이상으로 늘어났다. 투자 이민이 ‘좁은 문’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 투자이민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커졌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김지영 국민이주 대표는 “투자이민 금액이 많이 늘어나 상담이 끊길 것으로 예상했는데 투자이민이 재개되고 나니 여전히 교육과 상속 목적을 가진 자산가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며 “현재도 20여 명이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
‘준영주권자’ 신분 위해 관심↑
특히 유학생 자녀를 둔 자산가에게 투자이민은 새로운 ‘필수조건’이 됐다는 설명이다. 투자이민 신청 시 학생비자로도 영주권에 준하는 자유로운 취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박모씨도 미국에서 의대에 다니는 아들의 취업을 앞두고 투자이민을 결정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취업하려면 영주권이 필수적이어서다. 특히 올 3월 개정된 미국 투자이민법에 따르면 투자이민 신청 시 미국에 체류 중인 유학생에게 노동허가서와 여행허가서를 동시에 내주는 등 ‘준영주권자’ 신분을 보장해준다. 실제 영주권 발급까지 2~3년 걸리더라도 준영주권자 신분으로 자유로운 취업 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반 직종 취업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 취업하기 위해서는 취업비자(H-1B)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약 25% 확률의 무작위 추첨에서 당첨돼야 받을 수 있다. 이런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투자이민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증여세를 줄이려는 목적도 있다. 이유리 외국변호사(미국)는 “영주권자는 세무서에 신고한 돈이라면 자유롭게 해외로 옮길 수 있다”며 “부모와 자녀가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미국으로 전부 자산을 옮겼다면 미국 증여세를 적용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2022년 기준 미국은 증여세법상 세액 면제 한도가 약 1170만달러(약 167억원)인 데 비해 한국은 증여금액이 30억원을 초과하면 50%가 넘는 세금을 매기고 있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킹(PB)센터 관계자는 “PB센터에서 소수 인원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 때마다 신청자들이 몰려 조기에 마감된다”고 귀띔했다.

오현아/김동현 기자 5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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