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확산된 보호무역주의와 글로벌 경기 침체 위기감 모두 인재들의 ‘창조적 파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기업들의 혁신을 지원하고 감시할 때 혁신 성장은 가능합니다.”
프랑스 경제 석학인 필리프 아기옹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사진)는 1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처음 고안한 ‘창조적 파괴’는 경제 성장의 동력을 혁신으로 설명한다. 성공을 원하는 기업가는 기존 산업에 없던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낸다. 기술 혁신으로 기존 산업이 파괴되는 한편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보편화되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술이 또 생겨나며 자본주의는 발전한다.
아기옹 교수는 1910년대의 창조적 파괴 이론을 현대 경제학으로 다시 불러온 석학이다. 자본가와 기업에 집중했던 기존 이론을 국가와 정부에 확장해 적용했다. 미국 하버드대를 거쳐 콜레주드프랑스와 런던정치경제대, 인시아드 교수를 겸임하는 아기옹 교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경제 자문이다.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된다. 그는 다음달 3일 ‘글로벌인재포럼 2022’에서 ‘창조적 파괴와 디지털 혁신’을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할 예정이다.
세계 질서가 급변하는 ‘대전환 시대’에서도 혁신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된다. 국가 간 장벽이 세워지고 글로벌 공급망에 차질이 생겨도 새로운 환경에 맞춘 기술과 산업이 등장한다. 다만 혁신이 녹록지 않은 환경이다. 전쟁으로 물가가 치솟자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이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침체 위험은 높아지고 기업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졌다.
아기옹 교수는 “경기 침체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은 결국 제로 코로나 봉쇄를 풀 것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도 연내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고 기대했다. 이어 “경기가 침체될 때 정부가 혁신이 일어나기 적합한 산업을 알아보고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며 “지금은 친환경과 에너지 전환에 주목할 때”라고 조언했다. 대전환 시대에서의 인재상도 “친환경적이고 사회적인 기업가”를 꼽았다.
창조적 파괴는 실업을 동반하기 쉽다. 혁신을 통해 경제는 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파괴된 산업의 근로자들은 직업을 잃는다. 아기옹 교수는 해결책으로 덴마크의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 제도를 제안했다. 플렉시큐리티는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전(security)을 합친 말로 고용시장의 유연성과 사회 안전망 확충을 동시에 추구하는 개념이다. 기업이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대신 실업자들에겐 실업급여와 직업훈련을 충분히 제공한다. 대신 일자리를 거부하는 횟수 등에 제한을 두는 등 무분별한 실업자를 막는다.
그는 “플렉시큐리티는 직업 훈련이 보장되는 실업 보험을 통해 근로자가 자신의 커리어를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게 돕는다”고 강조했다. 근로자의 역량을 키워 특정 산업과 기업의 일자리보다 고용 자체의 안정성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비관했다. 혁신으로 만들어진 대기업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혁신을 방해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반면 아기옹 교수는 최근 출간한 저서 <창조적 파괴의 힘>에서 국가와 시민사회가 대기업을 규제하고 감시하면 창조적 파괴를 지킬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미국은 아마존과 구글 등 ‘슈퍼스타 기업’의 힘이 커지면서 새로운 혁신 기업이 진입하기 어려워졌고, 이는 2005년 이후 미국의 경제성장률 둔화로 이어졌다”고 짚었다.
아기옹 교수는 한국도 비슷한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분단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데 대기업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새로운 혁신을 막을 위험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는 경쟁과 개방을 촉진하는 정책을 펼치고, 한국 교육 시스템은 현재도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더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