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의 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게 플랫폼이다. 소비자는 선호에 따라 플랫폼을 갈아탈 수 있다. 멀티호밍도 가능하다. 특정 플랫폼이 독주하면 독점 시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새 플랫폼이 끊임없이 등장하면 특정 플랫폼이 계속 1등을 달리기 어렵다. 자유 시장경제에서는 법보다 시장이 무서운 이유다.
불행히도 이 나라 정부와 정치의 플랫폼 인식은 후진적이다. 정부가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유혹에 빠지는가 하면, 이해집단이 특정 플랫폼을 타깃으로 지목하면 정치가 나서 기어이 죽이고 만다. 모빌리티 타다를 몰아낸 것도 여야 정치권과 정부, 검찰의 합작이었다. 그 결과 카카오모빌리티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그런 정치와 정부가 독점 폐해를 운운한다. 새 플랫폼 촉진에는 관심이 없고, 플랫폼을 규제할 궁리만 한다. 시장을 왜곡하는 것은 정부와 정치다.
카카오 사태가 터지자마자 원인 파악은 뒤로하고 대통령실이 들고나온 것은 뜬금없는 안보 논리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독과점을 언급하며 ‘국민 입장’이란 새 기준으로 카카오를 주파수 국가 자원을 사용하는 기간통신망으로 규정해버렸다. 똑같이 독과점으로 비난받는 네이버의 빠른 복구는 언급조차 없었다. 자율규제가 휴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실은 “해킹을 통해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가정까지 동원해 안보 논리를 확대했다. 군·검찰까지 망라한 사이버안보 태스크포스(TF)가 출범했다. 민간 데이터센터와 플랫폼이 모조리 정부의 관리감독 대상임을 예고한 것이다. 대통령이 프레임을 잡으면 이후 모든 것은 여기에 꿰맞춰야 하는 게 권력의 속성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현장 방문에서 바로 규제 도입을 말했다. 여야 모두 규제입법 경쟁에 나섰다. ‘이중 규제’ ‘역차별’ ‘민감한 개인 데이터 유출 위험’ 등 규제를 반대하는 근거 따위는 온데간데없다. 국회는 장관에게 카카오 사태 사과를 요구하고, 장관은 주무부처란 점을 강조하며 사과하는 코미디 같은 장면까지 펼쳐졌다. 정부가 복구 상황을 브리핑하고 재난 문자로 알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민간기업 카카오가 졸지에 공기업이 돼버린 형국이다. 디지털 전환으로 모든 기업은 어떤 형태로든 플랫폼이나 데이터 기업으로 간다. 사고만 터지면 규제부터 쏟아내고 보는 권력의 집단광기에 점유율 높은 기업은 죄다 공기업이 될 판이다.
대통령실이 “윤석열 정부는 기업의 책임 방기에는 선을 긋는다”고 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얘기지만 착각이다. 정부가 사고 치면 책임 방기로 빠져나가는 일이 많지만, 기업이 사고 치면 시장이 가만있지 않는다. 시장은 플랫폼 탈출이나 전환으로 응징한다. 카카오는 돌이키기 어려운 손실을 입었다. 소비자는 피해보상을 넘어 카카오의 재발방지 조치를 지켜볼 것이다. 플랫폼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건 규제가 아니라 시장이다. 강한 데이터센터 규제는 오히려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을 막는 진입장벽이 되고 말 것이다.
대통령실은 카카오의 복구가 더디다고 했지만 정부 서비스는 사고가 나도 빠른 복구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 리질리언스를 중시한다지만, 이들이 국내 플랫폼 시장을 장악하면 리질리언스가 지금보다 낫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도 유럽연합도 미국·중국의 거대 플랫폼과 맞서는 네이버, 카카오 같은 대항마가 없다. 이들의 경제적 효과를 5류 정치, 3류 정부만 모른다.
대통령실이 안보 논리로 카카오를 때릴 때 정작 경제안보 측면에서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한국, 일본, 태국을 방문한다던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일정에서 한국이 빠졌다. 석유 감산을 둘러싸고 미국과 사우디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이 반도체로 강하게 죄어오면 중국은 희토류로 대응할 것이란 시나리오도 나온다. 석유, 반도체, 희토류는 한국 경제의 생명줄이다. 기업 책임은 기업에 맡기고 정부는 정부 할 일을 제대로 하는 날을 보기는 이번에도 틀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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