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 로건공항에서 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워번의 SES 본사. 지난 13일 방문한 이곳에선 다양한 인종의 SES 직원 100여 명이 반(半)고체 배터리인 리튬메탈 배터리(LMB) 연구에 한창이었다. 방호복을 입은 수십 명의 연구원이 충전 수명을 늘리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저용량 배터리의 충전 수명을 분석하고, 배터리 크기에 따라 적용을 확대하는 식이다. LMB와 전고체 배터리(SSB)는 현재 급속 충전 시 배터리 수명이 줄어드는데, 이를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와 비슷한 1000회가량으로 맞춰야 10년 이상 쓸 수 있다.
강기석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배터리 기술이 대용량 에너지 저장 시설로 확장된다고 가정할 경우 배터리는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기술”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기술 난제는 충·방전 횟수와 속도다. SES와 솔리드파워 모두 작은 용량의 배터리에서는 충·방전 횟수를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와 비슷한 800회가량에 맞췄지만 큰 용량의 배터리에선 고전 중이다. 고체 전해질은 액체와 달리 이온 전도도가 낮아 충전 속도가 느리고 충전 수명도 짧다. 이 고체 전해질이 다른 재료들과 맞물려 이온 활성도를 높여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치차오 후 SES 최고경영자(CEO)는 “지금 충전 수명에 관해 언급할 순 없다”며 “매우 어려운 기술”이라고 했다. 존 제이컵 솔리드파워 최고기술책임자(CTO)도 “용량이 큰 배터리의 충·방전 제어력을 높이는 게 당면한 과제”라고 했다. 게다가 고체 전해질, 리튬메탈 음극재 등의 가격이 비싸다는 점도 문제다.
LMB와 SSB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개발된 1990년부터 이론상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꿈에서만 볼 수 있어 30여 년간 ‘꿈의 배터리’로 불렸다. SES 사외이사를 겸직 중인 최장욱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고체 전해질은 소재 태생상 대기에 수분이 과하게 있으면 성능이 떨어지는 민감한 소재”라며 “이를 극복해야 양산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SES와 솔리드파워 등 미국 스타트업의 단점은 양산력 부족이다. 이들 기업이 세계 각국에서 ‘기가 팩토리’를 안정적으로 운영 중인 한국 배터리 업체와 손잡으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솔리드파워는 아직 차세대 배터리 개발 일정을 공개한 적 없는 SK온과 손잡고 2026년 시제품을 만들고 2029년부터 양산에 나설 계획이다. 솔리드파워 관계자는 “SK온이 양산성을 검증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덴버를 방문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후 CEO도 “배터리 업체, 완성차 업체와 함께 삼각 합작법인(JV) 설립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삼성SDI는 2027년 황화물계 SSB를 상용화한다는 목표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6년 고분자계 SSB 개발을 완료할 계획이다. 양산 목표 시기는 SES 등에 비해 1~2년 늦지만 대규모 공장을 갖춘 만큼 점유율에선 크게 밀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다만 한국의 ‘배터리 초격차’를 위해서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 교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한국 배터리업체들이 우위에 서게 됐지만, 앞으로 수천 명을 채용해야 하는데 인재가 부족하다는 게 문제”라며 “일선 현장 기술자와 더불어 최상위급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투 트랙’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미국의 IRA로 한국 배터리는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 업체 진출을 사실상 막은 데다 일본 파나소닉은 증설에 소극적이어서다. 미국 완성차업계와 주정부 고위 인사들이 한국 배터리 납품을 요청하기 위한 ‘방한 행렬’도 잇따르고 있다. 최 교수는 “배터리산업은 워낙 빠르게 성장하는 데다 정치적 이슈까지 얽혀 있어 6개월만 뒤처져도 ‘나락’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보스턴·덴버=김형규/박동휘 기자 k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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