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험한 일도 많이 당했다. 아이를 데리고 이발소에 갔더니 나가라고 호통치는 이발사도 있었고, 맞춤 휠체어를 위해 원하는 사양을 설명하는 중에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나가라는 의사도 있었다. 아이를 짐짝처럼 엑스레이 테이블 위로 내치는 방사선사도 있었다.
자라는 아이에게 치과 진료도 문제였다. 많은 치과가 승강기가 없는 상가에 있거나, 승강기가 있어도 큰 휠체어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다. 동네 치과에 갔을 때 일이다. 젊은 의사가 진료를 마치고는 진료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였겠지만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6개월 후에 다시 오라는 말이었나 보다. 진료비는 내고 나왔다.
아이가 다친 후 28년이 되어간다. 일곱 살이던 아이는 성인이 됐다. 아직도 우리와 함께해주는 것에 감사하다. 미국에서 사오던 의료용품도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보험이 적용되는 것도 있다. 서울특별시 장애인 치과병원이 생겨 6개월마다 진료받고 있다. 장애인 지원 정책도 점차 확대되고 있으나 중증 장애인을 위한 정책은 아직도 많은 아쉬움이 있다. 휠체어를 지원해준다지만 우리 아이처럼 많은 보조 장치를 갖춘 휠체어는 대상이 아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장애인 주간보호센터도 있었다. 홈페이지만 보면 다 해줄 것 같은 중증 장애인 복지관의 주간보호센터와 물리치료는 기약 없는 긴 대기자 목록을 가지고 있다.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다. 불쌍한 사람만은 아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더욱 아니다. 장애인 때문에 불편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두 배 이상 불편하고 힘들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장애인과 그 가족을 바라볼 때, 동정과 연민보다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응원하자. 그들이 불편해 보이면 도와줄 것이 있는지 물어봐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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