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약 먹었어요. 엄마가 약 먹고 어린이집에 가자고 했어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의 한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김모씨(28)는 최근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웃으며 등원한 아이가 "엄마가 말하지 말랬다"며 감기에 걸려 해열제를 먹고 어린이집에 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이 부모에게서는 별다른 얘기를 듣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운 마음에 동료 직원에게 조언을 구하니 "흔히 있는 일"이라며 "평소처럼 돌보다 열이 심하게 나거나 하면 그때 연락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감염병에 걸린 아이가 등원하면 다른 아이들에게도 병이 옮고, 다시 각 가정으로 퍼진다"며 "학부모들의 항의가 이어질 텐데, 어린이집이 등원을 거부할 방법도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고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최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는 '메타뉴모'라는 폐렴 바이러스가 돌고 있습니다. 여기에 계절성 질환인 수족구병과 RS/파라 바이러스도 유행하고 있지요. 유아들이 이러한 질병에 노출되면 감기에 걸린 듯 콧물과 기침, 가래가 나오다 폐렴으로 나아가고 손이나 발, 입 등에 수포도 올라오게 됩니다.
특히 수족구병은 이전 편에서도 언급했듯 전염성이 아주 강하고 치료제나 백신도 없는 데다 면역마저 생기지 않는 질병입니다. 그렇기에 독감과 함께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않아야 하는 법정전염병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주요 전파 경로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이기도 합니다. 병에 걸려도 등원하는 아이가 많아 어린이집에서 확산된다는 의미입니다.
보육 기관에서 감염병에 걸린 아이의 등원을 거부하면 좋겠지만, 이 역시도 어렵습니다. 영유아보육법과 유아교육법에는 감염병에 걸렸거나 감염이 우려되는 영유아에 대해 어린이집과 유치원 원장이 필요한 조처를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등원한 원아에게 어떤 조처를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은 빠져 있습니다.
화성시에서 A유치원을 운영하는 원장은 "조처를 하라는 법규를 살펴보면 보호자와 협의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며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유치원은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막무가내로 등원시키겠다고 하면 법적인 근거도 없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인천시에서 B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원장도 "동네 3곳이던 어린이집이 올해 2곳으로 줄었다"며 "가뜩이나 아이가 없어 문을 닫는 처지인데 학부모와 마찰까지 일으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부모들은 어린이집이 전염병의 온상이라는 불만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전업맘 하모씨(36)는 최근 수족구병에 걸렸습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감염되면서 엄마인 하씨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그는 "아이가 아픈 걸 숨기고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느냐"며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간 아이를 하루 3~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을 했던 하씨는 연말까지 가정 보육을 하기로 했습니다. 하씨는 "소아과에 물어보니 어린이집에 수족구가 한 번 돌면 한 달은 이어진다더라"며 "수족구에서 낫더라도 다른 아이에게 또 옮을 수 있어 잠시 어린이집을 쉬기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내는 부모를 탓하기보단 지원할 정책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맞벌이 부부인데다 조부모가 아이를 돌봐줄 여건도 되지 않는다면, 아이가 아프더라도 부모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없기 때문입니다.
2017년 국내 한 연구에서는 맞벌이 가구의 78.9%가 긴급보육의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긴급보육이 발생하는 경우의 64.8%는 자녀가 아픈 경우였죠. 아이가 감염병에 걸려 가정 보육을 하려면 회사를 최소 일주일은 쉬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아파질 시기를 예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사실상 즉흥적으로 일주일가량 휴가를 내는 모양새가 됩니다. 업무 일정이 꼬이는 탓에 회사의 허가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반복된다면 더욱 그렇겠죠.
정부도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지원하는 아이돌봄서비스에는 '질병감염 아동 아이돌봄 서비스'가 있습니다. 아이가 감염병에 걸렸지만, 부모가 직접 돌볼 수 없는 가정에 돌보미를 보내주는 제도이죠. 하지만 이용자가 많아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군포시에 사는 이모씨(30)는 "갑자기 휴가를 낼 수 없어 돌봄서비스를 신청했는데 돌보미와 매칭되지 않았다"며 "당일 지원은커녕 연계할 수 있는 돌보미가 없어 취소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이 서비스를 왜 운영하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해외에서는 맞벌이 가정 영유아가 질병을 앓는 경우를 대비해 전용 의료돌봄시설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례로 일본은 병원 등에 전용 공간을 마련해 감염병에 걸린 아이를 간호사 등이 일시적으로 보육하는 '병아 대응형 보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돌발 상황에 대응이 어려운 맞벌이 부부도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취지이죠.
우리나라는 방문형 아이돌봄서비스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지역별로 전용 의료돌봄시설을 만드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긴급한 상황이라면 언제든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감염병에 걸린 유아를 다른 유아로부터 격리하고 질병 전파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시기입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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