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골퍼들에게 '도전의 땅'이다. 수시로 방향과 속도를 바꾸는 돌발적인 바람, 여기에 바다와 한라산이 만들어내는 변덕스런 날씨는 골퍼들의 위기대응 능력을 한계치까지 시험한다. 한라산을 따라 바다로 기울어진 제주 전체 지형 탓에 그린을 읽을 때는 착시가 종종 발생한다. 제주 출신 골퍼들도 걸려 넘어지기 일쑤인 '한라산 브레이크'다.
하지만 바람도, 한라산 브레이크도 우승을 향한 이소미(23)의 집념을 꺾지 못했다. 이소미는 30일 제주 서귀포 핀크스GC(파72)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총상금 8억원)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7개, 보기 2개로 4언더파 68타를 쳤다. 최종합계 18언더파 270타로 2위 박현경(22)을 5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이소미는 '탱크' 최경주(52)의 완도 화흥초등학교 후배다. 에너지가 너무 넘쳐 좀 차분해지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골프를 시작했다고 한다. 데뷔 시즌인 2019년에는 신인상 포인트 1~3위인 조아연, 임희정, 박현경에게 밀려 4위에 그쳤지만 이듬해부터 두각을 드러냈고 지난해 2승을 올리며 KLPGA투어 강자로 자리잡았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이소미는 골프계 안팎에서 올해를 주름잡을 선수로 꼽혔다. 제주에서 보낸 동계훈련 동안 기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는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실제 성적도 좋았다. 올 시즌 준우승 1번을 포함해 총 9번이나 톱10에 들며 대부분의 대회에서 우승경쟁에 나섰다. 하지만 단 하나, 우승이 터지지 않아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이소미는 답답한 시간을 '연습'으로 돌파했다. 그는 "최근 하루도 쉬지않고 연습하고 있다. 이 성적으로는 쉴 자격이 없다"고 털어놨다. 대회가 끝난 뒤에도 곧바로 연습장을 향해 아쉬웠던 점을 보강했다.
연습벌레의 내공은 변수가 많은 제주에서 빛을 발했다. 이소미는 유독 제주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작년 롯데 렌터카 여자오픈을 비롯해 통산 4승 가운데 2승을 제주도에서 올렸다. 지난해 제주에서 치른 4차례 대회에서 우승, 3위, 4위 등 3번이나 최상위권에 올랐다.
올해도 제주도는 이소미에게 '약속의 땅'이 됐다. 지난 4월 롯데 렌터카 여자오픈에서는 준우승을 했고 8월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는 8위에 오르며 두번의 대회 모두 톱10을 기록했다.
비결은 낮은 탄도의 날카로운 아이언 샷이다. 이소미는 주니어 시절부터 강한 바닷바람을 가르는 샷을 훈련해왔다. 덕분에 KLPGA투어에서 낮은 탄도의 아이언샷을 가장 잘 구사하는 선수로 꼽힌다. 올 시즌 그린적중률 76%로 KLPGA투어 9위를 달리고 있다.
이날 이소미는 1타차 단독 선두로 최종라운드에 나섰다. 시작은 매끄럽지 못했다. 6번홀까지 보기 3개를 범하며 우승경쟁에서 밀리는 듯했다. 이정은(26)과 유해란(21), 박현경, 이가영(23), 김수지(26) 등 쟁쟁한 경쟁자들이 그의 부진을 틈타 리더보드 최상단을 위협했다.
이소미는 7번홀부터 내리 3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분위기를 바꿨다. 여기에 11.12번홀에서 연속 버디를 뽑아내며 2위 그룹과의 격차를 벌렸고 마지막 18번홀(파4)을 버디로 마무리하며 완벽한 승리를 만들어냈다. 이소미는 "6번 홀 까지는 오랜만의 챔피언조라 약간 긴장했었다"며 "너무 욕심부리고 있다는생각에 7번 홀부터 스스로에게 집중했던 게 우승의 원동력이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흔히 우승자에게 쏟아지는 물과 꽃잎 세례를 볼 수 없었다. 전날 밤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핼러윈 참사로 희생자가 발생한 것을 애도하는 의미에서다. KLPGA와 대회 주최 측은 대회 중에도 갤러리에게 과도한 환호와 응원을 자제해줄 것을 부탁하며 엄숙한 분위기에서 경기를 치렀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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