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불쑥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그가 잘 모르는 사람일 때는 씁쓸해진다. 늙음을 감추고 싶은 게 속마음인데 그걸 들켜버린 데서 오는 난감함 때문이다. 나이 숫자가 더해질수록 신체 노화의 정도, 쇠락의 징후들은 더 흉하게 불거지고, 불현듯 늙는다는 실감이 불청객처럼 내 인생에 끼어든다. 얼굴에 드러난 주름살과 검버섯, 피부의 늘어짐, 백발, 기억력 쇠퇴 등은 다 늙음의 굴욕들이다. 늙음이 어리석음이나 윤리적 결함 때문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우리는 나이 듦의 굴욕보다는 젊음의 생동을 취하고 싶은 것이다.
“제 나이로 안 보이세요. 훨씬 젊어 보이세요.” 이런 소리를 들을 때 기분은 밝아진다. 이 말은 세월의 흐름보다 천천히 나이를 먹는 사람이 들을 법한 소리다. 나이의 구속에서 벗어나 살았다는 의미와 여전히 젊음이란 상징 자본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 칭찬이다. 나이가 나를 삼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이는 나를 삼킨 세월의 응축이고, 살아온 세월과 그 속에서 겪은 사건의 총합이다. 나이가 훈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이는 삶의 성취와 무관하게 거저 얻은 결과이니, 나이 많음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짓은 비웃음을 사기에 맞춤한 일이다.
나이란 우리 의지가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누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생물학적 나이를 보태게 된다. 우리는 유아기,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차례로 거친다. 나이에 걸맞은 삶의 형상이 있다고 믿는 까닭에 삶을 나이대로 매듭을 지어 구분하는 것이리라. 누군가는 나이가 인격의 성숙도와 그 가치를 가늠하는 요소라고 믿는다. 그런 믿음의 바탕에서 “나잇값도 못 한다”는 말이 생겼을 테다.
나이와 비대칭을 이룬 인격의 미성숙함과 성기고 얇은 앎으로 사람 구실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한 개별자의 부실한 인격과 실행 능력의 허접함을 콕 집어 지적하는 비난은 하나로 겹친다. 나이가 들수록 완숙 경험과 지혜, 이성의 분별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에 비춰볼 때 이 비판과 비난은 옳다.
스무 살 때 세월이 더디게 가는 탓에 나는 조급했다. 왜 그토록 시간이 더디 흐르던지! 나는 나이의 제약에 묶인 채로 어쩔 수 없이 질풍노도의 불안정과 내면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 괴로워했다. 내 스무 살은 신뢰할 수 없는 미숙함의 징표일 뿐, 푸르게 뻗치는 도약과 약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젊음은 경미한 뇌진탕과 같았다. 나는 의기소침에 빠진 채 혼란에 빠져들어 빨리 늙었으면 했다. 그 열망은 오직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판돈을 날린 서툰 노름꾼처럼 젊음을 탕진하고 백발이 된 채 맞은 노년의 시간은 곤경으로 바뀐다. 노년이 노화와 온갖 질병을 안고 지내는 고투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년에 죽음을 맞는 것, 그게 인생이다. 어떤 노인은 혼자 쓸쓸하게 고독사를 맞고, 더 많은 경우는 인생의 종막을 요양병원에서 맞는다. 노모가 생의 마지막 두 달을 요양병원 침상에서 아무 희망도 없이 연명 치료를 받다가 흐지부지 죽는 걸 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인간은 나이가 떠미는 힘에 의해 낯선 시간으로 밀려간다. 노인은 그 낯선 시간의 끝까지 밀려나 죽음과 마주하게 되는 사람이다.
죽음은 나이 듦의 종착역이자 생의 미완성에 대한 복수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느닷없이 닥쳐오는 재난의 한 방식이다. 누가 감히 실존의 절대적 조건인 죽음에 저항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걸 하나의 필연으로 수납할 수밖에 없다. 고령이란 죽음의 징후들로 수놓은 예고편, “삶의 맥락으로 편입되지 못하”(로마노 과르다니, <삶과 나이>,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127쪽)는 그걸 받아들이는 일은 지극히 인간적인 묵인이다.
노인은 그저 나이만 먹은 사람이 아니라 생의 전 기간에 걸쳐 우여곡절과 생존 투쟁을, 역경과 파란을 견디고 승리를 거머쥔 사람들이다. 아무리 평범해도 노인은 삶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살아서 돌아온 영웅이다. 나이란 그 영웅들의 값진 전리품이다. 더는 나이 많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누군가 내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꽃 같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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