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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록적인 엔화 약세의 원인을 미·일 금리 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엔화가 안전자산에서 투기자금의 먹잇감이 됐다”고 분석했다. 달러가 주요국 통화에 대해 극명하게 강세를 보이는 ‘킹달러’의 시대다. 하지만 엔화의 추락 속도는 유독 심하다. 올 들어 엔화는 튀르키예 리라 다음으로 가치가 많이 떨어진 통화다.
제어장치 망가진 日경제
일본은 심각한 경제난이나 금융위기를 겪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도 경제가 파탄난 나라보다 통화가치가 더 크게 떨어지자 일본 내부에서도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엔화의 끝 모를 추락은 달러 가치가 올라서기도 하지만, 일본 경제의 약체화가 엔화 가치에 반영된 탓이라는 자기반성이다.
일본의 경제 전문가와 미디어들은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의 초저금리와 엔저(低)에 10년 가까이 의존한 외상값이 돌아왔다”고 진단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대규모 금융 완화를 유지한 부작용이 ‘엔화 가치 32년 최저’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는 현재의 일본 경제를 브레이크와 과속방지 센서가 망가진 자동차에 비유한다. 과거에는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 수출이라는 과속방지 센서가 작동해 브레이크가 자동으로 걸렸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엔화로 바꾼다. 엔화를 사려는 수요가 늘어나면 엔저 속도가 적정 수준으로 늦춰졌다.
일본 경제의 제어장치가 망가진 건 기업이 엔화 가치 급등을 피해 생산시설을 대거 해외로 옮기면서다. 1990년 4.6%였던 일본의 해외생산 비율은 2020년 22.4%까지 올랐다. 2020년 일본 기업의 해외법인 수는 2만5700개로, 2007년보다 54% 늘었다. 상장기업의 해외매출도 230조엔으로 30% 증가했다.
반면 일본 경제를 유지하는 비용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휘발유값(수입 비용)이 치솟는데 연비(통화 가치)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 차량에 비유할 수 있다. 일본은 에너지의 90%, 식료품의 60%를 수입에 의존한다. 올 들어 국제 원자재와 식료품값이 급등하면서 일본의 수입 규모는 급증했다.
여기에 엔저가 겹치면서 수입 부담을 증폭시키고 있다. 지난 7월 엔의 실질실효환율(통화의 종합적인 실력을 나타내는 환율)은 58.7로 1971년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본의 구매력이 5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의미다. 150.85였던 1995년의 3분의 1 수준이다.
초저금리 부작용 속출
여기저기서 부작용이 나타났다면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 체질을 바꾸는 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본은 인위적인 초저금리와 엔저에 의존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엔진 성능 강화제(초저금리)로 차를 무리하게 가동하고, 기름값을 아낀다며 저질 휘발유(엔저)를 쓴 셈이라는 말이 나온다.일본 정부가 경제를 얼마나 무리하게 굴리는지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닛세이기초연구소는 10년 만기 국채의 정상적인 금리 수준이 연 1.5%대라고 분석했다. 현재 일본 국채 10년 만기 금리는 연 0.25%다. 일본은행이 연 0.25% 금리에 국채를 모조리 사들여 금리를 정상 수준보다 1.25%포인트 낮춰 놓은 결과다.
이처럼 무리하게 초저금리를 유지하자 환율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은 400조엔(약 3848조원)이 넘는 해외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31년째 세계 1위 규모다. 해외자산을 통해 외화로 벌어들이는 배당과 이자수입은 급격한 엔저를 막는 마지막 안전장치였다. 외화 수입을 엔화로 바꾸면 엔화 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초저금리에 익숙해진 일본 기업은 배당과 이자수입을 엔화로 바꾸는 걸 꺼리고 있다. 예금금리가 ‘제로(0)’이고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연 0.25%인 일본에서 엔화로 투자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엔화 가치가 계속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일본 기업들이 외화로 벌어들인 수입을 환전하지 않는 이유다. 일본 종합상사 관계자는 “엔화 자산을 늘리기보다 금리가 높은 해외에 재투자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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