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위기는 언제나 정부가 불렀다

입력 2022-11-02 18:25   수정 2022-11-03 00:24

“영국에서는 옛 방식과 옛 유형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대체된 후에도 계속 득세했다.” 오래된 방식과 복고형 사람들이 새로운 출발을 가로 막고 현상 유지에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었다는 게<영국 병(The British Disease)>의 진단이다. 저자 조지 앨런은 “국가 미래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개 비상경제민 생회의에서 모든 부처가 산업부가 되고 수출에 나서라고 했다. 갑자기 60년대,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장면이 펼쳐 졌다. 각 부처가 보고했지만 재탕·삼탕인데다 왜 비상이란 말이 붙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회의였다. 그렇게 풀릴 문제라면 무슨 고민이 필요하겠나. 한국이처한 시대 상황이 과거와 구조적으로 달라졌는데도 이런 전제 따위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지정학적 목적 달성을 위해 경제·기술 등을 수단으로 동원하는 지경학 시대는 모든 나라가 공통으로 처한 환경이다. 그것도 미국·중국, 미국·러시아가 충돌하고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하트랜드와 림랜드 등 전통 지정학 이론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다. 유라시아 지역 패권을 노리는 국가와 그 지역에 적대적인 패권이 출현하고 본토까지 위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미국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다. 경계선상의 국가 들은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윤 정부가 수출의 돌파구라고 말하는 원전 및 방산의 수주환경과 민감성, 안보·주 권과의 연계도는 그 전에 비할 바 아니다. 폴란드가 국가 원전 발주를 미국 회사에 주고 안보를 사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미국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다. 이걸 몰랐다면 한국은 전략이 없었던 것이다. 방산 수출도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을 알고 있다”고 해 파장을 몰고 왔다. 진위 여부를 떠나 방산 수출이 갖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리스크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원전 한 방, 방산 한 방으로 반전될 한국 경제도 아니다.

지경학 시대로 수입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는 메이저 석유생산국이다. 특히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소비국이자 생산국으로 해외에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는 에너지 독립국이 됐다. 중동에 대한 지정학적 이해가 과거와 같을 리 없다. 미국과 사우디의 긴장 속에 러시아와 사우디의 공조가 빈 공간을 치고 들어왔다. 미국이 제재를 가하고 충돌이 발생하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불안해질 것이다.

미국·중국의 갈등이 산업의 업스트림 쪽으로 번지고 있는 것도 한국으로서는 위기다. 반도체를 둘러싼 마찰이 단적인 사례다. 인공지능(AI)→반도체 →정밀기기→재료→화학 등 상대방 급 소 찌르기가 위로 향하면 중국이 희토류 카드를 꺼내지 말란 법도 없다. 일본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규제를 이미 경 험해 충격을 낮춘 바 있지만,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지경학 시대는 수출입 환경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기업이 수출대상국 요구에 따라 공장을 현지로 옮기는 대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해외로 나간 기업의 부가가치가 국 내로 순환돼 돌아오지 않는다면 수출 효과는 사라진다. 지경학 시대 수출·입이 모두 새로운 리스크에 직면했다. 밖에 비상경제민생회의라고 걸어놓고 대통령과 장관들이 한가롭게 문답을 주고 받고 웃고 할 그런 상황이 아니다.

지리적 관계가 불변이어도 지정학적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변수는 기술이다. 전산업의 디지털 전환으로 소프트웨어가 모든 상품을 구동하는, 무형의 서비스 수출시장으로 치고 들어가는, 지경학 시대를 돌파하는 새로운 수출 패러 다임에 대한 창의적 토론을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옛사람이 모여 옛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위기감도 비전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정부’ 때문에 한국 무역이 길을 잃게 생겼다.

실물경제 리스크를 금융이라도 경쟁력이 있어 완화해주면 좋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비상한 금융 상황에서 해법을 기대했던 국민도 실망하기는 마찬가지다.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정부는 외환위기의 악몽만 떠올리게 할 뿐 이다. 모든 위기는 외생적인 게 아니라 내생적인 것이다. 윤 대통령은 “쇼를 하 지않겠다”고 했지만, 허망한 비상경제 민생회의는 쇼보다 못 하다. 위기는 언제나 무능한 정부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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