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생명의 다른 말이다.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땅에 씨앗을 심어 자라나게 한다. 텅 빈 공간에서 어머니는 많은 것을 태어나게 한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정신을 평생 캔버스에 옮겨온 이가 있다. 30년간 역동적인 추상화를 탐구해온 제여란 작가(62)다. 그는 “예술은 어머니처럼 생명을 지지하고 기쁨을 조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선 공기의 흐름과 땅의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서울 마곡동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18번째 개인전 ‘로드 투 퍼플’의 하이라이트는 보라색 대형 신작이다. 역동적인 보라색이 큰 화면 위에 펼쳐진다. 온몸으로 캔버스 위를 넘나드는 작가의 몸짓까지 상상할 수 있다. 끊길 듯 이어지는 보라색의 변주는 추상회화가 줄 수 있는 시각적 환희를 전한다. 제 작가는 보라색에 대해 “붉은색과 푸른색이 결합된 색이지만 그 자체로 분리 불가능한 ‘단독의 색’”이라며 “까다롭고 고귀한 자태를 갖고 있는 색”이라고 말했다. 그가 “생명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강조하듯 작품 안에선 역동적인 율동감이 느껴진다.
전시는 그동안 작가가 탐색해온 색채의 흐름에 주목한다. 1990년대 검은색을 다루며 질감을 도드라지게 만든 작품들은 2000년대 초반 어두운 톤의 푸른 색조와 붉은 색조가 대비를 이루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캔버스에 판화 도구인 스퀴지(잉크를 고르게 펴 누르는 고무가 달린 밀대)를 활용한 작품도 1992년부터 등장했다.
제 작가는 안료와 질료를 배합하고 점도를 다르게 해 캔버스에 다양한 색을 표현해 왔다. 색이 퇴적되는 과정과 시간에도 의미를 뒀다. 스퀴지는 그의 회화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도구다. 그의 '보라색'은 아크릴판 위에 붉은 물감을 얹고 그 위에 푸른 색을 더해 온몸으로 색을 밀어낸 결과다. 곡선 위에 직선이 맞물리며 화면 전체의 긴장감이 살아난다.
그는 “화가가 도구를 다룬다는 건 마치 수영 선수가 자기 기량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훈련과 닮았다”며 “예기치 않은 결과가 등장할 때의 쾌감은 물론 폭넓은 수직과 수평의 선들을 마구 섞을 수 있기 때문에 스퀴지는 이제 몸의 일부가 된 셈”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추상을 마주한 관람객들에게 그림이 이끄는 대로 한번 따라가다가 유난히 시선을 잡아끄는 장면 앞에 빠르게 다가가 보라고 권한다. 그러다 휙 돌아서서 쌀쌀맞게 뒤돌아보기도 하고, 멀리서 다시 한 번 슬쩍 보는 감상법을 추천했다. “내면의 이야기와 그림이 만났을 때, 관람객 각자의 시선이 그림을 자극하는 또 다른 에너지가 된다”는 게 그 이유다.
제 작가는 1985년 홍익대를 졸업한 뒤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싱가포르 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주요 단체전에서 활약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토탈미술관, 루이비통재단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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