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작품 안에 다양한 색깔과 캐릭터가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연주가 단조롭게 흑백이어서는 안 되죠. 충분한 상상력을 가지고 음표 사이사이 소리까지 만들어내면서 연주하세요.”
8일 서울 여의도 신영증권 본사 내 신영체임버홀.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69·사진)는 로베르트 슈만의 ‘유모레스크’를 연주한 신창용(28)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흐 스페셜리스트’ ‘베토벤 해석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명연주자 쉬프는 ‘피아니스트들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손에서 펼쳐지는 연주가 너무나 깔끔하고 완벽한 데 따른 것이다. 그가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절대 잊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한국 젊은 연주자들을 위한 마스터 클래스다.
쉬프는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2008년 피아니스트 김선욱, 2011년 조성진과 만났다. 올해는 제네바·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문지영(27)과 지나 바카우어 콩쿠르 우승자 신창용이 쉬프의 지도를 받았다. 헨레 피아노 콩쿠르 대상 수상자인 이주언 군(11)도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했다.
첫 연주자로 나선 신창용이 피아노에 손을 올리자 쉬프는 미동도 없이 소리에 집중했다. 연주가 끝난 뒤 신창용의 왼편으로 가까이 다가선 쉬프는 “악보에 표시된 것보다 훨씬 더 과장해서 표현해야 한다. 재미있는, 유머러스한 부분을 더 꺼내서 연주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그는 “16분음표 진행을 악보에 있는 그대로 치지 말고 마치 말을 하듯 연결해서 쳐야 한다.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국 피아니스트들에 대한 쉬프의 애정은 마스터 클래스 진행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3시간 20분가량 이어진 수업에서 쉬프는 단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제한된 시간에 하나의 조언이라도 더 자세히 건네고 싶은 마음에서다.
쉬프는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을 연주한 문지영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해석하면서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듯이” “뜨거운 접시에 손이 반응하듯이” “두 개의 첼로가 서로 소리를 주고받듯이” 등 악상 표현에 적확한 여러 비유를 쏟아내면서 연주자의 잠재력을 끌어냈다. 열정적인 레슨에 몰입한 문지영이 숨죽인 채로 연주를 이어가자 60여명의 관객이 순식간에 움직임을 멈추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쉬프는 자신만의 연주 노하우까지 꺼내며 연주자들을 격려했다. 그는 “16분음표 아티큘레이션(음절별 연주 방식)에 신경 쓰려면 손을 건반에 더 가깝게 위치시키고 조금 더 깊게 손가락을 돌려야 한다”며 “두 손으로 같은 선율을 동시에 연습해두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쇼팽의 ‘론도와 마주르카’를 연주한 유망주 이주언에게는 기본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쉬프는 자신의 운지법을 직접 보여주며 “좋은 운지법을 사용하면 어려운 테크닉을 훨씬 더 쉽게 풀 수 있다. 이는 집에 가서 연습해야 할 숙제”라고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꾸밈음이 있어도 주선율이 명확히 들리도록 해야 한다”며 “너무 빠르게 치지 말고 악보에 쓰여있는 지시어를 지키는 데 집중하라”고 덧붙였다.
연주자들과 하나의 의자에 앉아 함께 곡을 연주하거나 시범 연주를 보이는 식으로 레슨을 이어간 쉬프는 마스터 클래스가 끝나자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학생들의 연주 수준이 매우 뛰어나다”고 소감을 밝혔다. 신창용은 "테크닉을 뛰어넘는 음악적인 상상력을 계속해서 전해주셔서 너무나 큰 영감을 받았다"며 "다시 초심을 다지고 음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문지영은 "쉬프 선생님께 제 연주를 들려드리고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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