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절감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던 시대에 구축해 놓은 글로벌 공급망에 취약점이 하나둘 드러나자, 더 믿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공급망을 재정비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기술 선진국들은 신속하게 대응에 나서는 중이다.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표방하는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통해 반도체 제조업의 리더십 부활을 꿈꾼다. 유럽연합(EU)도 올해 초 반도체법을 공개했으며, 탄소국경세 같은 녹색 규제를 내세워 우회적인 기술무역장벽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 소부장 정책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공급망 리스크는 통제하기 어려운 외부 요소가 많이 개입하기 때문에 당장 해소하기 어렵다. 좀 더 포괄적인 수준의 국가 전략을 세워야 한다. 현안 중심의 해결책보다는 입체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첫째, 정책 스펙트럼의 확장이 필요하다. 기존 대책은 일본 수출 규제로 촉발됐기에 아무래도 당장 타격을 받는 주력 산업에 지원이 몰린 측면이 있다. 산업 구조가 새롭게 변화할 미래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첨단 산업에도 두루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 난도가 낮고 값싼 범용품, 원소재라 하더라도 공급망 안정에 꼭 필요한 품목이면 관리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
둘째, 복합적이고 선제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동안 소부장 기업에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목적은 주로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이려는 것이었다. 이제는 기술 자립화를 넘어 표준화, 사업화, 수출, 해외 시장 선점까지 감안한 종합 연계 지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울러 핵심 광물과 주요 원자재 수급 관리에 서둘러 나서야 한다. 정부가 소부장 특별법에 공급망 안정화 조치를 추가해서 개정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소부장 공급망은 산업이 활기차게 성장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핏줄 같은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노력은 경제안보를 굳건히 지키고, 산업의 튼튼한 기초와 미래를 준비하는 백년대계, 천년대계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마침 이달 초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소부장뿌리 기술대전’ 행사에서는 대한민국 산업 백년대계의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석한 관계자들은 단기적 목표 달성에 일희일비하는 대신 장기적인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는 점, 수요-공급 기업 간 선의의 협력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공감했다.
대한민국 소부장이 나아가려는 길은 지금껏 비싸다는 이유로,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가지 않으려던 길이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산업 대전환의 시대를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지름길, 쉬운 길만 고집할 수는 없다. 한 발짝 앞서 내다보는 넓은 시각과 긴 호흡으로 산업의 백년대계를 차분히 그려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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