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듯 무섭게 치솟는 검은 파도. 그 파도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으면 오묘한 색의 섬광이 일렁인다. 더 가까이 가면 희미하게 새겨진 야생 팬지 꽃잎들도 나타난다. ‘유리의 마법사’로 불리는 프랑스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이 2017년 유리벽돌 1만 개를 쌓아올려 만든 높이 6m, 길이 15m의 대작 ‘더 빅 웨이브(The Big Wave)’. 이 작품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를 강타한 쓰나미의 끔찍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다. 멀리서 볼 땐 재앙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그 안에 희망과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지난달 파리 외곽 몽트뢰유에 있는 오토니엘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비가 내리던 이날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에 놓인 그 파도 앞에 다시 섰다.
“유리는 가장 연약하지만 또한 가장 강력한 재료입니다. 누군가가 정성껏 잘 보살피기만 한다면 1000년이 지나도 변함없으니까요. 조금 더 들어와 보세요.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하는 ‘벽돌’을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유리’로 만든 의미가 느껴지나요.”
조금만 부주의해도 깨지기 쉬운, 그래서 현대미술사에서 외면받아온 유리라는 재료를 그는 20년 넘게 작업의 주요 재료로 써왔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프티팔레,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 일본 모리미술관, 카타르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세계적 박물관은 물론 까르띠에, 디올 등 명품 브랜드와 주요 종교 성지까지 이제 그의 작품을 찾아 전시하고 소장한다.
물류 창고였던 공간을 개조해 만든 그의 스튜디오는 텅 빈 명상의 장소를 연상시킨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리모델링을 막 끝냈다는 스튜디오 안에서 누구나 검은 파도에 압도당하고, 곳곳에 놓인 유리구슬 작업들과 유리 벽돌에 시선을 한참 빼앗긴다.
“나만의 스튜디오가 아니라 모든 예술가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천장도 더 높게 하고, 중정(중앙 정원)을 더 넓혔습니다. 제 작품 사이에서 무용 공연도 열고,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도 더 해보려고요.”
오토니엘은 1964년 프랑스 중남부 소도시 생테티엔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렸다. 1980년대에 그는 파리를 떠나 세계여행을 했다. “지루했어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즈음 1년을 머물기도 했고, 홍콩과 일본 구마에서도 살았죠. 15년간 여행만 했던 것 같아요. 다른 문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며 영감을 주고받았어요. 예술가도 결국 세상의 일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시 수천 년에 걸쳐 발전해온 유리공예와 유리 공장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그에게 상실의 시간도 함께 찾아왔다. 성소수자인 오토니엘의 동성 연인이자 현대미술가였던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죽음(1996년)으로 오토니엘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런 그를 건져낸 건 유리였다. 당장이라도 방심하면 산산조각이 나고야 마는 유리가 자신의 마음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1990년대 중반 이탈리아 무라노의 유리공예 장인들과 함께 흠집과 상처가 난 유리구슬을 제작했다. 연인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그 유리구슬로 목걸이를 제작한 뒤 점차 추상 조각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유리는 곧 자연이자, 희망이자, 인간이 됐다. 유리를 어루만지며 사람들과 다시 소통하는 통로를 찾은 동시에 치유의 힘을 얻기도 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유리 작품들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아름다운 꽃이 되고,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됐다.
“다루기도 어렵고, 쉽게 깨지는 성질이 있어 처음에 수집가들조차 별로 원하지 않았어요. 유리 조각이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끊임없이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죠. 그냥 아무 데나 던져놓고 내가 소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림도 세상엔 많으니까요.”
그의 작품은 혼자 만드는 법이 거의 없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유리 장인들과는 20년째, 인도 장인들과는 10년째 함께 작업해오고 있다. 이 중 인도 피로자바드 유리 공예가들은 2000년 넘게 이어온 전통 방식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끝없이 유리구슬이 연결되는 형태의 ‘오라클’ 시리즈는 수학자와 수백 번의 연구 끝에 밑그림을 그려 완성한 작품이다.
오토니엘은 최근 프랑스 국립예술학교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작가들을 가르치는 총감독도 맡고 있다.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준비하며 바쁜 가운데 주 1회씩 여러 분야의 다른 작가들과 워크숍을 여는 그는 “힘들지만, 단절의 시기를 끝내고 다시 ‘연결’됐다는 기쁨에 즐겁다”고 했다. 예술가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의 과제를 하고 있다는 보람도 느낀다고 했다.
오토니엘의 작품을 직접 봤을 때 느껴지는 영롱한 아름다움 때문일까. 유리라는 것을 알고 다시 보면 서늘한 감정이 몰려오기도 한다. “유리는 연구하면 할수록 천의 얼굴을 가졌어요. 어둡고 단단하게, 부드럽지만 때로 강인하게, 투명하고 밝게 표현할 수 있죠. 아마도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닮지 않았을까요.”
몽트뢰유=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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