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럼 더코닝은 잭슨 폴록과 함께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거장이다. 1920년대부터 강렬한 추상화로 세계 미술계를 휩쓸었다. 그런 그에게 1953년 무명의 20대 화가가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는 미술 프로젝트가 있으니 그림 한 점 기증해주세요.”
더코닝은 젊은 예술가에게 작품 하나를 내줬다. 크레용과 유성연필, 잉크, 흑연으로 그린 것이었다. 몇 주 뒤, 이 젊은이는 ‘지워진 더코닝(Erased De Kooning)’이란 발칙한 제목을 단 텅 빈 그림을 금박 액자에 끼워 세상에 내놨다. 그리고 그 액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로버트 라우션버그.’
라우션버그(1925~2008·사진)는 이처럼 거장의 작품을 지움으로써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현대 미술사의 명장면을 새겨넣었다. 이후에도 그는 일상의 모든 재료를 작품에 넣었다. 그 덕분에 팝아트 등 현대미술의 기틀을 닦은 주역이자 미국의 첫 ‘미술올림픽’(베네치아비엔날레) 금메달(황금사자상·1964년) 수상자란 타이틀을 갖게 됐다.
‘예술가이자 모험가’로 불리는 라우션버그의 1980년대 대표 작품 ‘코퍼헤드’ 연작 12점이 서울 용산 타데우스로팍갤러리에 걸렸다. 중년의 라우션버그가 칠레를 여행하다 구리 광산에서 전수한 기법으로 시도한 작품들이다.
라우션버그의 눈은 언제나 현실을 바라봤다. 개인의 역사와 사회의 단면을 모아 회화와 조각, 설치 예술로 표현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약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중 캘리포니아 도서관에 걸려 있던 그림 한 점을 보고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때는 그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거나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게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는 시절이었지만, 그는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거나 아름다운 풍경만 그리는 건 더 이상 예술의 역할이 아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려야 할 것들’을 캔버스에 붙인 뒤 물감으로 덧칠했다. 라우션버그의 ‘콤바인 페인팅’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0년대엔 인종문제와 베트남전, 달 착륙 등 보도 이미지들을 조합해 ‘이게 우리가 알아야 할 현실’임을 강조했다. 거리에서 보는 표지판과 소방차, 자신이 쓰던 이불도 작품 재료로 썼다. 음악과 기술을 결합한 미디어아트 작품도 다수 남겼다. 스스로 ‘거리에서 얻은 선물들’이라며 익숙한 재료로 새로운 예술을 부지런히 창조했다.
그는 먹고살기 힘든 예술가를 돕기 위해 1970년 비영리단체 ‘체인지’를 설립했다. 라우션버그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개인 자금을 투입해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멕시코 칠레 중국 말레이시아 등 10개국을 방문하고 11개국에서 관련 전시를 했다.
이 프로젝트 중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은 게 ‘코퍼헤드’ 시리즈다. 1984년 칠레에 머물던 그는 구리광산과 주조공장을 방문해 약품 활용법과 변색 기법 등을 전수했다. 구리판에 이미지를 입히고 그 위에 회화적 기법으로 마무리한 12점의 ‘코퍼헤드 바이트’에는 동물과 건축물, 표지판 등 칠레 여행 때 촬영한 흑백사진 이미지들이 포함됐다.
약품을 들고 구리판 위에 흩뿌린 장면들은 섬세한 붓놀림을 연상케 한다. 그는 “작품의 이미지들이 구리를 베어 문 자국인 셈”이라고 했다. 이 작품들은 이후 여러 금속 작품을 낳았다. 전시는 12월 23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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