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도록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소설 하나만 번역했다. 낮에 자고 매일 자정에 일어나 하루 6~8시간씩 꼬박 번역 작업에 매달렸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코르크로 문틈을 막고 방 안에 틀어박혀 이 소설을 14년간 집필한 것처럼.
최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번역을 마친 김희영(73) 한국외대 프랑스어과 명예교수는 16일 서울 신사동 민음사 본사에서 기자들을 만나 "약 10년간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살았다. 아직도 번역 작업이 끝난 것 같지 않은 기분"이라며 웃었다.
그는 2012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을 번역해 출간한 이후 10년 만에 최근 13권을 출간하며 번역 작업을 마무리했다. 1~13권 총 분량은 5704쪽에 달한다.
그가 처음 민음사로부터 번역 제안을 받은 건 2005년이었다.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거란 생각에 망설이던 그는 "불문학자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번역을 시작했다고 했다.
김 명예교수는 "프루스트의 소설은 '서양문화의 보고'인데 도스토옙스키, 카프카에 비해 한국 독자들에 덜 알려져 있다"며 "더 많은 한국 독자들이 프루스트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으며 추억에 젖어드는 장면으로 유명하지만, 막상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잘 없다.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 인간 내면과 시대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분량이 방대하기로 악명이 높다. 프루스트는 1909년부터 1922년 폐렴으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14년을 매달려 이 작품을 썼다. 오는 18일은 프루스트 서거 100주기다.
김 명예교수는 "프랑스의 저명한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프루스트는 당대 미술, 음악 작품과 일상사 등 '백과사전적 지식'을 소설에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문화사·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며 "프루스트가 프랑스 국민 작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프랑스인들에게 '기억의 궁전'이라 불리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김 명예교수는 국내에서 프루스트 전문가로 꼽히는 불문학자다.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프루스트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학회장, 한국불어불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런 김 명예교수에게도 번역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대 프랑스 귀족 계급, 뒤레퓌스 사건 등 워낙 여러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작품이라 하루에 원서 기준 3쪽 남짓을 겨우 번역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도 아직도 고치고 싶은 부분이 눈에 들어와요."(웃음)
오죽하면 13권 초고를 올 봄에 민음사에 줬다가 ‘좀 더 고쳐야겠다’며 다시 되찾아갔을 정도다. 김 명예교수는 지도교수였던 장 미이 파리 3대학 교수와 수시로 메일을 주고 받으며 번역 작업을 이어갔다.
이토록 낯선 작품을 우리는 왜 읽어야 할까. 김 명예교수는 “프루스트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본 작가”라며 “난해하고 어려운 작가로 각인돼있지만,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여러 매력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다. “이 소설은 인간이란 단일한 인간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수없이 변하는 존재라는 걸 고찰했고, 유대인이나 성소수자 등 사회 문제도 다뤘죠. ‘나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질문은 현재에도 유효하죠. 또 이건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기도 해요.”
프루스트의 매력은 일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들에서 극대화된다. “대개 역사라는 건 굵직한 사건만 다루기 마련이잖아요. 역사서를 통해서는 섭렵할 수 없는 일상을 보존하는 게 바로 문학작품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김 명예교수는 소설가 이문열이 언젠가 이 작품을 두고 ‘극세밀화’라고 표현한 걸 언급하며 “프루스트는 진정한 리얼리즘을 보여준 작가”라고도 했다.
김 명예교수가 전체 13권 중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1권에 나온다. 잠에서 막 깨어난 화자가 “동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헐벗은 존재”로 깨어나는 부분이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썼다.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줬다.”
김 명예교수는 “프루스트는 어머니,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고통을 겪은 뒤 소설을 썼다”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를 망각에서 구할 수 있는 건 글쓰기밖에 없고, 그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프루스트가 삶에 대해 갖는 애정과 호기심에 놀라게 되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번역하는 시간은 제게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프루스트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방대한 분량, 난해하다는 ‘악명’에도 번역을 기다리며 책을 좇아 읽는 독자들이 적지 않았다. 김 명예교수는 “고등학교 한문 교사라는 독자가 ‘프루스트 따라서 파리 여행도 했다’고 편지를 보내줬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수집가의 책장에 장식품처럼 꽂혀있는 책이 아니라, 지하철에서도 들고 다니면서 읽는 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 명예교수는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해설서를 집필할 예정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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