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디 여린 당신의 허리춤에 긴 마취 침 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눈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손잡아주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그 순한 눈매에 맺혀 오는 투명한 이슬방울
산고의 순간은 이토록 무섭고 외로운데
난 그저 초록빛 수술복에 갇힌 마취의사일 뿐일까?
사각사각 살을 찢는 무정한 가위소리
꼭 잡은 우리 손에 힘 더 들어가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편히 감는 눈동자 속에 언뜻 스쳐 간 엄마의 모습
몇 달 후 찾아와서 부끄러운 듯 내어놓은
황톳빛 비누 두 장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가 먹다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그때 손잡아주시던 때
알레르기로 고생한다 하셨잖아요
혼자 남은 연구실에서 한동안 말을 잊었네
기어코 통곡 되어 눈물, 콧물 다 쏟았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더 고맙습니다
* 김기준 : 시인, 연세대 의대 마취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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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의 아침 시편]을 엮은 책 『리더의 시, 리더의 격』이 출간됐습니다.
위 표지 오른쪽 화살표를 누르면 책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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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리더의 시, 리더의 격』에 실린 ‘교감’ 부분을 요약해 소개합니다. 시에 얽힌 사연은 저의 ‘아침 시편’ 내용이고, 뒷부분의 ‘선행이 복을 부른다’는 황태인 회장의 체험적 인생 경영론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책에 29꼭지 실려 있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는 마취 침을 놓고 난 뒤 불안해하는 산모의 손을 꼭 잡아줬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해보세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수술 침대에 누운 산모가 그의 손을 꾸욱 잡았습니다. 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지요. 어느 순간 손톱이 그의 손등을 파고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산모가 “어머나! 선생님 손에 상처가……” 하며 당황했지요. “아니에요. 얼마 전에 생긴 피부 알레르기 때문이에요.”
몇 달 뒤 퇴근 시간, 누군가 그의 연구실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혹시 저 기억나세요? 몇 개월 전 저 아기 낳을 때 마취하고 손 잡아주셨잖아요. 저 때문에 손에 상처가 났었는데.”
“아! 그때…….”
“그날 정말 무서워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선생님 손만 꼬옥 잡고 놓치지 않으면 모든 게 무사히 다 지나갈 것이다. 그 마음뿐이었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주시니 오히려 제가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차 한잔의 시간이 지난 후 일어서던 그녀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냈습니다.
“피부 알레르기에는 모유로 만든 비누가 최고래요. 이건 제 아이가 먹고 남은 초유로 만든 비누예요.”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가는 그녀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습니다. 한참 후 포장을 열어보니 그 속엔 아기 손바닥만 한 황톳빛 비누 두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말을 잊었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끝내는 통곡이 되어 눈물 콧물 범벅이 됐지요. 그날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쓴 시가 ‘비누 두 장’입니다.
그 눈물겨운 사건(?)은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시인의 꿈을 다시 꾸게 해줬습니다. 2016년 <월간 시> 신인상으로 등단하고 시집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사물에 대한 예의』를 내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지요.
육체적 고통을 다독이는 마취와 영혼을 어루만지는 정신의 치유를 병행하는 의사 시인 김기준. 그는 마음의 문을 똑똑 두드려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주고, 다시 시를 쓸 수 있게 해주었으며,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따스한지 일깨워준 그때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날 수술실에서 불안해하는 산모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의사를 부드럽게 이어준 것은 ‘손’과 ‘눈’이었지요. 꼭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두 사람의 교감은 깊어졌고, “편히 감는 눈동자 속에 언뜻 스쳐 간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온전한 평화와 안도가 찾아왔습니다.
시의 제목이기도 한 ‘비누 두 장’은 산모를 위로하던 의사를 거꾸로 위로하고 치유하는 아름다운 매개체이지요. 그래서 “괜찮아요”가 “고맙습니다”로 바뀝니다. 치유받은 사람의 마음이 치유하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서 다시 “고맙습니다”를 낳는 선순환의 착한 삶이 그 속에 녹아 있지요. 이 시가 담긴 첫 시집의 제목이 『착하고 아름다운』인 것도 이런 맥락과 닿아 있습니다.
참, 그가 받은 비누의 효능은 어땠을까요. 한 장을 써본 결과 신기하게도 한 달 만에 손등의 피부염과 가려움증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는 “나머지 한 장은 곱게 다시 포장해 나만 아는 깊숙한 곳에 평생의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며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충실함으로써 조그만 호텔의 지배인에서 세계적인 호텔의 사장이 된 사람의 일화도 있습니다. 호텔왕으로 유명한 조지 볼트(George Boldt)가 그 주인공인데요. 평소에도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배어 있던 그는 작은 친절을 베풂으로써 뉴욕의 애스토리아 호텔 사장으로 발탁되어 화제를 모았습니다.
볼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은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늦은 밤에 노부부가 예약을 하지 않고 호텔에 들어왔지요. 보통 미국에서는 예약을 하지 않고 현장에서 방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밖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고 시간도 새벽 한 시가 넘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정이 딱해 보였던 노부부에게 볼트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객실은 없습니다만, 폭우가 내리치는데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주무시겠어요?” 볼트는 노부부에게 친절을 베푸느라 방을 내어주고 자신은 의자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노부부는 깨끗하게 정돈된 볼트의 방을 보며 철두철미한 그의 직업의식을 엿보았다고 합니다.
노부부는 밤을 보내고 아침에 떠나면서 볼트에게 행운을 빌어주었습니다.
“어젠 너무 피곤했는데 덕분에 잘 잤어요. 당신은 앞으로 제일 좋은 호텔의 사장이 되어야 할 분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훗날 우리가 당신을 초대할 테니 꼭 와주세요.”
정확히 2년 후 볼트에게 편지 한 통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 티켓이 도착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방에서 묵었던 노부부가 보낸 초청장이었지요. 볼트는 뉴욕으로 가 노부부를 만났고 그들은 볼트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뉴욕 중심가에 우뚝 서 있는 한 호텔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저 호텔이 맘에 드나요?”
“저런 고급 호텔은 너무 비쌀 것 같으니 제가 더 저렴한 곳으로 알아보겠어요.” 볼트가 이렇게 말하자 노부부는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걱정 말아요. 저 호텔은 당신이 경영할 수 있도록 내가 지은 겁니다. 이 호텔을 맡아줄 거죠?”
그 노인은 바로 백만장자인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William Waldorf Astor)였고, 볼트의 친절과 배려에 감동해 맨해튼 5번가에 있던 선친의 맨션을 허물고 방이 1,442개나 되는 애스토리아 호텔을 세운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변두리 작은 호텔의 평범한 지배인이었던 볼트는 미국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애스토리아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우리의 작은 친절과 배려가 언젠가 보이지 않는 복덕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이 쉽지 작은 일에 충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초고층 빌딩도 작은 벽돌이 쌓여 이루어지듯 작은 일에 충실하면 큰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기를 바란다면 늘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도록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난처한 상황과 어려움을 헤아려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달래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켈러는 자신을 가르쳐준 앤 설리번(Anne Sullivan) 선생님이 보여준 감정 이입에 감동받았죠. 설리번 역시 장애와 싸울 때 맛보는 좌절감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시각을 거의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켈러와의 의사소통 방법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장애를 극복한 켈러는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을 돕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고, 일생을 자기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감정 이입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평소에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이 필요할 때에 도움을 주는 선복(善福)을 쌓아야 합니다. 결국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재벌 그룹 회장은 자기가 키워볼 인재라는 생각이 들면 청소부터 시켜본다고 합니다. 청소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을 볼 수 있다고 여겨서지요.
여러분도 남에게 친절과 배려심을 베풀면 아름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남의 감정과 상황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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