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연주는 남달랐다.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78·사진)는 지난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첫 내한 독주회에서 유려한 선율 표현과 세밀한 음색 조절로 자신의 이름값을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 만 4세 때부터 독주회 무대에 오는 그가 70여년 세월을 녹여낸 연주는 원숙함의 결정체였다.
청중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피레스는 짧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건반에 손을 올렸다. 첫 곡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3번. 그의 특기인 가벼운 터치가 시작부터 귀를 사로잡았다. 모든 음이 튀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청아하면서도 명료한 음색이 여름날 짧은 휴가로 마음에 안식을 얻던 슈베르트의 심경을 대변하듯 어울렸다. 뛰어난 해석 역량도 빛을 발했다. 이 작품에는 당시 슈베르트가 만난 소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담겨있는데, 그는 특유의 따뜻한 음색으로 순수한 소리와 서정적인 선율을 구현해냈다.
셈여림 변화를 이끌 때도 실력은 돋보였다.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러운 것 하나 없이 소리 크기가 달라졌는데, 이는 선율의 흐름에 따라 손이 맞춰 움직이며 만들어낸 결과였다. 피레스의 소리는 전체적으로 큰 편이 아니었는데, 작은 소리에 모든 표현이 온전히 담기면서 오히려 청중의 집중력을 이끌어냈다. 각 음표의 길이나 느낌을 약간씩 다르게 연출한 것은 작곡 당시 고정된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슈베르트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에서는 동양을 연상시키는 5음계 선율을 신비스럽고도 오묘한 음색으로 들려줬다. 모든 음이 그의 손가락 안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피레스의 연주는 피아노의 건반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지그시 누르며 교감하는 것에 가까웠다. 3번 ‘달빛’ 연주는 압권이었다. 가벼운 터치에 모든 감정이 응축된 듯 표현되는 피아노의 선율과 그로 인해 펼쳐지는 깊은 울림은 황홀함을 느끼게 했다.
슈베르트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적어낸 피아노 소나타 21번에서는 노련한 연주가 돋보였다. 약 45분간 이어지는 작품에서 그는 음의 특성에 따라 손가락 강도와 깊이를 다르게 조절하며 곡의 기승전결을 표현해냈다. 연타 구간에서도 힘이 아닌 손의 무게로 진하고도 깊은 음색을 만들어냈다. 같은 음의 반복이지만 각각의 소리를 다르게 표현하면서 앞으로 가는 듯한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눈에 띄었다
준비된 연주가 끝나고 기립박수를 보내던 청중은 피레스가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는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나이가 여든에 다다른 만큼 으레 앙코르곡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그렇게 연주된 곡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 그는 예민하고도 세밀한 터치로 몽환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무대의 마지막 순간까지 완성도 높은 연주를 선보였다.
물론 그의 연주는 모든 음에 자신의 영혼을 끌어내듯 열정적으로 치는 연주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날 무대에서도 강한 터치가 필요한 화음 연주나 감정을 몰아붙이며 소리를 키우는 구간에서는 힘에 부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안은 명연이 흐르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70여년의 연습으로 온몸의 움직임에서 흘러나오는 예술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으니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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