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체업 초격차' 대가파우더시스템…바이오로 세계 시장 노린다

입력 2022-11-28 19:52   수정 2022-11-28 19:53


한자로 가루 '분(粉)'자를 쓰는 분체업은 말 그대로 재료를 가루로 만드는 산업을 뜻한다. 과자와 라면스프 등 식료품은 물론 화학품, 플라스틱, 철강, 2차전지까지 가루가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분체업은 우리 경제의 대표적인 뿌리산업이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분체업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 분야에서 국내 시장 70% 이상을 점유하는 업체가 있다. 1970년 설립된 국내 최초 분체설비 전문기업 대가파우더시스템(이하 '대가파우더')이 주인공이다. 대가파우더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 분체업의 역사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포스코케미칼, 삼성SDI, LG화학, 한화솔루션, KT&G, 3M, 바스프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대가파우더의 오랜 고객사다.
천막 공장서 시작…일본·독일 기업과 경쟁할 정도로 성장
대가파우더는 부산에서 양조업을 하던 창업주 최대식 전 회장이 1970년 서울 구로구 온수동에 대가분체기계라는 천막 공장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일본 최고의 분체기계 회사인 호소카와미크론의 연구원으로 일하다 귀국한 지인이 한국의 산업화를 내다보며 분체업을 권유한 것이 계기였다.

최은석 대가파우더 대표는 "분체업은 건조-분쇄-혼합-이송-집진의 과정으로 진행된다"며 "이걸 통틀어 분체기계산업 플랜트라고 하는데 국내에 분체 플랜트 기업은 우리 밖에 없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분체 플랜트가 어려운 이유는 고객사의 요구에 맞게 100% 맞춤 생산을 해야 해서다. 고객사가 10곳이면 10곳 모두 가루로 만들고자 하는 원료와 완제품이 다른 만큼 각 특성에 따라 기계를 하나하나 맞춤형으로 제작해야 한다. 기술 축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국내에는 경쟁사가 없고, 세계 시장에서 일본, 독일 기업들과 맞붙고 있다.

지금은 대가파우더가 세계적인 분체업체로 우뚝 섰지만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변변찮은 설계도 한 장 없이 시작했던 터라 초창기엔 신통치 않았다. 일본 기계를 수없이 뜯고 조립한 끝에 겨우 제품을 하나 만들었지만 일본 제품에 비할 바가 못됐다. 엔지니어들의 노하우가 중요한 분체업에서 패기 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러는 사이 손해가 쌓이면서 자금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최 전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창업 10년이 지나자 제품의 품질이 안정화되더니 때마침 한국의 산업화가 속도를 내면서 분쇄기 수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서 분쇄기를 들여오던 국내 대기업들도 빠른 사후 처리와 가격 경쟁력을 가진 대가파우더를 주목했고 이내 물량을 맡겼다. 1990년대까지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업계에서는 "대가파우더를 모르면 바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직원들 마음 얻으려 공장서 먹고 자는 날 부지기수
최 대표가 경영에 뛰어든 시점은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한국 경제가 휘청일 때다. 최 전 회장은 위기가 닥치자 창업 1세대는 물러나야 할 때라며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경제학을 전공한 후 프랑스 유학을 통해 석·박사 과정을 거쳐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최 대표는 자신이 대를 이어 회사를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회사를 물려받고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매출이 급격히 줄어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최 대표는 "회사를 물려받는다고 하니 친구들이 지금 사업할 때가 아니라면서 뜯어 말렸다"며 "IMF가 터지니 일감이 줄었고 아차 싶었다"고 회고했다. 위기의 순간 그가 떠올린 건 수출이다. 대표 취임 후 1년 만인 1999년 태국의 SCG그룹에 자체 이름으로 설비를 수출했다. 이것이 내수 중심에서 해외시장으로 시야를 확장하는 시발점이 됐다. 이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으로 수주 영토를 넓히면서 지금은 연 매출의 40%가량을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문제는 또 있었다. '2세 경영'에 대한 회사 내부의 편견에 마주한 것. 최 대표는 "회사에 30년 이상 된 사람이 10명이나 되고, 40년 근속을 한 직원도 있다"며 "현장에서 쌓은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을 텐데, 회장 아들이 갑자기 대표라면서 들어오니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나"라고 터놨다.

최 대표는 직원들의 마음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현장에서 먹고 자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공장에서 직원들과 쇳가루를 함께 마시고 땀에 젖은 작업복을 갈아입으며 애로사항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직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최 대표는 "리더는 존경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나"면서 "직원들의 마음을 얻으면 전부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24년째 '스킨십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날카로운 글라인더를 다루는 사업장을 여럿 운영하고 있지만 반세기 동안 단 한 건의 사망사고도 발생하지 않은 건 이 같은 분위기가 작용했다는 게 최 대표의 신념이다. 그는 "직원을 대우하지 않는 회사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며 "사람에 대한 존중이 대가파우더의 장수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대가파우더 분말지혈제, 美 FDA 인증 '초읽기'
대가파우더는 100% 천연 식물성 소재로 만든 의료용 분말지혈제 '스팁씰(Styp-Seal)'과 링거 내 불순물을 99% 걸러내는 세라믹 주사기 필터 및 수액세트 '씨아브이인퓨전세트(Civ-Infusion Set)'를 내놓으며 바이오로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특히 분말지혈제 시장은 높은 수준의 분체기술을 요구하는 분야여서 진입 장벽이 높고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 업체들 제품 가격도 지나치게 비싸다. 국내에서는 대가파우더 외에 도전할 만한 업체가 전무한 상황이다.

최 대표는 '파우더 기술 1등'이라는 자존심을 걸고 이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 어떻겠냐는 지인의 제안에 주저하지 않았다. 바이오가 차세대 먹거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다. 대가파우더의 분말지혈제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 식품의약국(FDA) 인증을 내년 4월에 취득할 가능성이 높다. 기술력은 물론 가격 경쟁력까지 갖춰 수입 대체효과까지 낼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국내 대다수의 종합병원이 스팁씰을 사용하고 있다.

최 대표는 "클린룸 4개와 연구개발(R&D) 센터를 지은 당진공장을 의료기기 개발 전용 기지로 키울 것"이라며 "의료 쪽이 활성화되면 당진공장에 훨씬 많은 인원을 채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최 대표는 기업승계에 대해선 "나 역시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엄청난 세금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며 "독보적인 기술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일본이나 독일처럼 중소기업에 맞춘 기업승계 제도가 조속히 자리 잡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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