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노천명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시 ‘사슴’의 첫 구절이다. 필자는 어쭙잖게 이 시구를 목 상태가 안 좋을 때 흔히 썼다. 젊은 시절 깡말랐을 때 제법 목이 길어 터틀넥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열혈청년에게 목까지 덮는 옷은 정말이지 갑갑하고 목 언저리도 까끌까끌해서 이내 벗어 던져버리곤 했다. 엄동설한에도 앞깃을 활짝 열어젖혀 목을 훤히 드러낸 상태로 거리를 활보했는데 목감기에 걸리기 일쑤였다. 군대 가기 전 늦가을엔 기관지염을 심하게 앓아 쿨럭쿨럭 밤새 기침 소리를 냈다.
요 며칠 날씨가 변덕스러워 쌀쌀해진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넥타이를 내려 앞섶을 풀고 좀 돌아다녔더니 이내 목감기에 걸려 버렸다. 밭은기침과 콧물 그리고 미열은 덤이다. 순간 아차 싶은 게 코로나 증상인가 염려됐지만 의심 가는 구석은 없어 일단 코로나는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먹으니 차차 낫고 있다.
실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게도 목감기에 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목과 기관지가 약한 탓이고 이건 유전이지 싶다. 부친도 건조해진 겨울철이 다가오면 기침이 잦았는데, 진달래꽃술을 담가 드시면서 많이 나아진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아득한 기억이지만 어머니는 봄철 야산 일대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을 잔뜩 따다 술에 담가 놓았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그렇지 않아도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한테 잔소리 한 사발을 얹어 진달래꽃술을 드리곤 했다.
고질병인 기침을 낫게 해드리겠노라고 정성을 부리던 어머니와 은근 진달래꽃술을 마다하지 않고 홀짝홀짝 드시던 아버지의 기억이 초겨울 지겨운 필자의 기침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며 눈앞이 흐려진다.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약한 목을 가진 것조차 이제는 그리움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그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개나리, 진달래 만발한 야산을 엄마 손을 잡고 누비던 아련한 기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날이 춥고 목이 아파도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의 한 귀퉁이에 들어앉아 있으면 마음만은 따뜻하다. 소설가 박완서의 작품 중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라는 소설이 있다. 추운 겨울이 따뜻할 리 만무하다. 무슨 사연이 있었든지 그로 인해 추운 겨울에도 마음이 따뜻했다는 뜻이리라. 다가오는 겨울에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사연 하나만 있어도 겨우살이가 그리 힘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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