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물은 완벽하다

입력 2022-12-02 18:04   수정 2022-12-03 00:23

경북 포항의 모교 낭독 행사에 초청받아 다녀왔다. 10명의 이름 옆에는 내가 쓴 시의 제목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나는 단 한 편의 시도 낭독하지 않았다. 시는 모두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낭독됐다. 나이도 성별도 그간의 경험도 다 다른 사람들의 낭독을 듣고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킨다. 높낮이가 다른 목소리, 느리거나 빠른 말의 속도, 한 사람의 발음과 떨리는 호흡. 실수 없이 끝까지 읽는 것도 좋지만, 조사 하나를 바꿔 읽거나 특정 글자 앞에서 머뭇거리는 버릇 덕분에 완벽해지는 시도 있다.

낭독자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나의 국어 선생님도 계셨다. 선생님은 내가 고3 때 쓴 시를 낭독해주셨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시였다. 고교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거라 잘 쓴 시라고 기억했는데, 다시 보니 소쿠리에 담긴 채 쪼글쪼글 말라가는 싹 난 감자를 어머니의 희생에 비유한 그저 그런 뻔한 시였다. 그런데 좋았다. 선생님의 목소리로 들으니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우는 기분이랄까? 선생님은 눈이 어두워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며 더 밝은 쪽으로 몇 걸음 옮겨가시더니 안경을 벗고 낭독을 시작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서점에서 산 한 권의 시집을 수십 번 다시 읽으며 시를 흉내 내던 때의 나를 어쩜 저렇게 진심으로 읽어주실까. 어디로든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여전히 가슴을 울려왔다.


낭독회가 끝나고 손 편지가 가득 든 종이 상자를 선물 받았다. 집에 와 하나하나 꺼내 읽어보는데 한 학생의 편지에 오래 마음이 붙들렸다. ‘빨래집게’라는 시에 대해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편지였다.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도 아이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말에 눈물이 날 뻔했다고 쓰여 있었다. 편지 속 ‘눈물’이라는 단어는 왜 이리 사람을 잡아끄는 것인지, ‘눈물’은 그렇게나 많은 상투성을 껴입고도 여전히 아름답구나 싶었다.

“작고 알록달록한 양말들을 집게로 집으며/ 버리고 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요”란 구절을 지나와 아이의 양말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아냐고 물었을 때 분명 웃었던 것도 같은데, 이 학생은 얼마나 가슴이 저렸을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현재 직장암에 걸리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저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시는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에 옮겨 심긴다. 그러고는 그 사람의 시로 다시 자란다. 낭독회에서 처음 보는 시인에게 꺼내 보인 이 마음이 시가 아니면 무엇일까. 아직 고등학생일 뿐인 이 아이가 여덟 살 때는 철이 없었다고, 지금도 철이 안 들었다고 하는 말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들이친다.

글을 쓸 때마다 완벽에 대해서 생각한다. 완벽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완벽해 보이는 것일수록 흠이 많았다. 그렇다면 흠이 많아서 완벽하다는 건가? 틈을 벌리고 들어찰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강물은 많은 물줄기가 모여 하나의 물줄기로 흘러간다. 어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어떤 물은 위로 또 어떤 물은 가장자리로 또 어떤 물은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돌에 걸려 아주 늦게 흐른다. 이음새도 없이 금방 하나가 되는 물,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도 여러 줄기가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따로따로 각자의 상처 안에서 철옹성이 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드는 시를 그려본다. 완벽보다는 완벽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에 있다. 그래서 물은 완벽하다.

“우리도 가서 구경하면 안 되나?”

작은 규모의 낭독회에 부모님까지 모신다는 게 너무 요란스러운 것 같아 말렸지만,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은 기어이 맨 뒷자리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피해 주지 않고 조용히 구경만 하겠다며 오셔서는 사회자 선생님의 멘트에 일어나 청중의 대대적인 인사도 받았다. 하기야 대학 졸업식 때는 외할머니부터 고모 이모 삼촌 팔촌에 당숙까지 다 와서 사진을 찍었지.

나는 가까운 이들의 호들갑 덕분에 내가 하찮다는 생각을 덜 하고 살았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은 내 곁으로 다가와 내 헐거워진 틈을 껴안고 일어서게 한다. 내가 쓰는 시가 어려워서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딸이 하는 말을 들어보려고 호들갑 떨며 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부모님. 완벽이란 마음에서 태어난다는 듯 진지하면 어깨가 굳고 그림자마저 뻣뻣해진다며, 유연하고도 완벽한 물처럼 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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