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자 중에는 고등학교 시절 나의 국어 선생님도 계셨다. 선생님은 내가 고3 때 쓴 시를 낭독해주셨다. 까맣게 잊고 있던 시였다. 고교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거라 잘 쓴 시라고 기억했는데, 다시 보니 소쿠리에 담긴 채 쪼글쪼글 말라가는 싹 난 감자를 어머니의 희생에 비유한 그저 그런 뻔한 시였다. 그런데 좋았다. 선생님의 목소리로 들으니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일으켜 세우는 기분이랄까? 선생님은 눈이 어두워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며 더 밝은 쪽으로 몇 걸음 옮겨가시더니 안경을 벗고 낭독을 시작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서점에서 산 한 권의 시집을 수십 번 다시 읽으며 시를 흉내 내던 때의 나를 어쩜 저렇게 진심으로 읽어주실까. 어디로든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여전히 가슴을 울려왔다.
낭독회가 끝나고 손 편지가 가득 든 종이 상자를 선물 받았다. 집에 와 하나하나 꺼내 읽어보는데 한 학생의 편지에 오래 마음이 붙들렸다. ‘빨래집게’라는 시에 대해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편지였다.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도 아이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말에 눈물이 날 뻔했다고 쓰여 있었다. 편지 속 ‘눈물’이라는 단어는 왜 이리 사람을 잡아끄는 것인지, ‘눈물’은 그렇게나 많은 상투성을 껴입고도 여전히 아름답구나 싶었다.
“작고 알록달록한 양말들을 집게로 집으며/ 버리고 갈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요”란 구절을 지나와 아이의 양말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아냐고 물었을 때 분명 웃었던 것도 같은데, 이 학생은 얼마나 가슴이 저렸을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현재 직장암에 걸리셨어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다 저를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시는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에 옮겨 심긴다. 그러고는 그 사람의 시로 다시 자란다. 낭독회에서 처음 보는 시인에게 꺼내 보인 이 마음이 시가 아니면 무엇일까. 아직 고등학생일 뿐인 이 아이가 여덟 살 때는 철이 없었다고, 지금도 철이 안 들었다고 하는 말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들이친다.
글을 쓸 때마다 완벽에 대해서 생각한다. 완벽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완벽해 보이는 것일수록 흠이 많았다. 그렇다면 흠이 많아서 완벽하다는 건가? 틈을 벌리고 들어찰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강물은 많은 물줄기가 모여 하나의 물줄기로 흘러간다. 어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어떤 물은 위로 또 어떤 물은 가장자리로 또 어떤 물은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돌에 걸려 아주 늦게 흐른다. 이음새도 없이 금방 하나가 되는 물,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지고도 여러 줄기가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따로따로 각자의 상처 안에서 철옹성이 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드는 시를 그려본다. 완벽보다는 완벽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에 있다. 그래서 물은 완벽하다.
“우리도 가서 구경하면 안 되나?”
작은 규모의 낭독회에 부모님까지 모신다는 게 너무 요란스러운 것 같아 말렸지만,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은 기어이 맨 뒷자리 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피해 주지 않고 조용히 구경만 하겠다며 오셔서는 사회자 선생님의 멘트에 일어나 청중의 대대적인 인사도 받았다. 하기야 대학 졸업식 때는 외할머니부터 고모 이모 삼촌 팔촌에 당숙까지 다 와서 사진을 찍었지.
나는 가까운 이들의 호들갑 덕분에 내가 하찮다는 생각을 덜 하고 살았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은 내 곁으로 다가와 내 헐거워진 틈을 껴안고 일어서게 한다. 내가 쓰는 시가 어려워서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딸이 하는 말을 들어보려고 호들갑 떨며 온,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부모님. 완벽이란 마음에서 태어난다는 듯 진지하면 어깨가 굳고 그림자마저 뻣뻣해진다며, 유연하고도 완벽한 물처럼 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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