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과 우울감으로 예전 사진들을 훑어보다가 문득 2016년 방문한 미국 자이언캐니언이 눈에 들어왔다. 황량하고 메마른 거대한 바위산, 그 속에서도 생명을 꽃 피우는 동식물을 보고 있노라니 위로가 됐다.
그래서 그는 붓을 들었다. ‘미술 선생님’은 유튜브였다. 장혜진은 최근 그의 개인전 ‘소요인상-FLOW(플로우)’를 연 서울 논현동 갤러리치로에서 기자와 만나 “코로나19 전까진 틈틈이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지만 제대로 미술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다”며 “유튜브를 보면서 화구를 사는 법부터 색을 칠하는 법, 유화·수채화 그리는 법 등을 하나하나 익혔다”고 했다.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아웃사이더’의 시각은 오히려 강점이 됐다. 그는 자신이 본 자이언캐니언의 풍경을 다양한 색깔로 새롭게 해석했다. “언뜻 보면 자이언캐니언은 죽어 있는 바위산 같아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다양한 생명이 살고 있죠. 그게 제게는 다양한 색깔로 느껴졌어요. 노랑, 빨강, 보라, 주황…. 다채로운 색깔을 통해 자이언캐니언이 좀 더 생동감 넘치고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죠.”
자이언캐니언 그림은 첫 개인전을 여는 계기가 됐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정권 갤러리치로 대표는 그의 그림을 보고 당장 전시회를 열자고 했다. “이 대표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느냐’며 깜짝 놀라더라고요. 나중에 미술계 사람들이 전시에 와서 하는 말을 들어 보니 ‘미술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서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미술 배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장혜진의 그림에는 대자연 속의 생명체가 담겨 있다. 자이언캐니언을 그린 작품 ‘플로우-자이언 캐니언(Flow-Zion Canyon)’에선 산양들이 바위를 타고 있고, 아치스캐니언을 배경으로 한 ‘플로우-트와일라잇 존(Flow-Twilight Zone)’에는 까마귀가 나무에 앉아 있다. 비현실적인 풍경과 그 안에 실제 살고 있는 동식물들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장혜진은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따뜻한 생명이 살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30년 가수 경력도 그림에 녹아 있다. 장혜진의 그림엔 직선이 거의 없다. 호소력 짙고 리드미컬한 그의 음색처럼 대부분이 곡선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마치 노래 리듬을 타는 것처럼 곡선을 많이 사용했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 자체로 ‘치유’였다. 그는 “그림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우울감을 잊고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작업실로 향한 뒤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는 일도 잦았다. 개인전을 준비하는 석 달간 몸무게가 3㎏ 빠졌다.
그렇게 준비한 첫 개인전이 지난 3일 마무리됐다. 결과는 성공적이다. 전시한 그림 11점이 단숨에 ‘완판’됐다. 미술계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다음 목표’를 묻자 그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전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해요. 그게 바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방법이니까요.”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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