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는 <반지의 제왕>이나 <듄>에 견줄 만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등에 참여한 할리우드 유명 콘셉트 디자이너 이안 맥케이그는 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눈물을 마시는 새>는 영웅의 여정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냈다”며 “우리에게 ‘영웅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질문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번 인터뷰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게임과 영상화를 위한 아트북 <한계선을 넘다> 출간을 계기로 이뤄졌다.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이 작가가 2002년 PC통신 하이텔에서 연재한 소설로, 한국 대표 판타지 작품이다.
맥케이그와 국내 게임회사 크래프톤은 이 소설을 게임 및 영상화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2년간 준비한 일러스트 등을 모은 책이 <한계선을 넘다>다.
책에는 원작 소설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소재로 한 300여 점의 일러스트와 작품 줄거리, 상세한 해석이 담겼다. 지난달 11일 예약 판매를 시작했는데 3일 만에 초판 5000부가 다 팔렸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이영도 작가의 소설 <눈물을 마시는 새>가 가진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이 이야기가 왜 매력적으로 느껴졌나.
=‘눈물을 마시는 새’는 그간 내가 읽었던 어떤 판타지와도 다른 신선한 방식으로 인간 본성을 탐구한다. 그거야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다. <반지의 제왕>이나 <듄>에 견줄 만한 서사다. 고전적인 ‘영웅의 여정’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내 우리로 하여금 영웅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눈물을 마시는 새>를 시각화할 때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 무기, 혹은 장소는 무엇이었는지. 어떤 점을 표현하는 게 가장 고민스럽고 까다로웠나.
=이영도의 판타지 세계는 전통적 요소에 완전히 독창적인 꿈과 악몽의 이미지를 섞어놓아 풍부하고도 본능적이다.
식물인 용, 거구의 수탉 인간, 커다란 딱정벌레를 타는 장난꾸러기 도깨비…. 하지만 나를 가장 고심하게 만들면서도 보람있었던 건 케이건 드라카, 사모 페이, 륜 페이 세 주인공이었다. 제각기 영웅과 괴물이 혼합된 독특한 존재들이다. 매혹적이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이들을 어떻게 독자에게 사랑받도록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반대로, 시각화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캐릭터나 무기, 장소를 소개해준다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작업이 동시에 가장 즐거운 작업이다. 시각화 작업은 탐정이 되어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고고학이 필요한 부분, 보물 찾기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구현해 나가는 작업은 늘 가장 큰 도전이자 큰 기쁨이다.
▶독자들이 각자 머릿속으로 상상한 작품 세계를 하나의 모습으로 구현해내려면 부담감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또 소설 원작 외에 도움을 얻었던 콘텐츠가 있다면 무엇인가.
=모든 소설은 상호보완적이다. 작가는 상상을 유도하고, 독자는 각자의 독창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영화와 게임 같은 시각적 매체에 소설과 같은 텍스트 매체를 접목하는 비법은 소설이 상상하게 만든 이미지를 믿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세한 부분은 독자들의 상상과 다를지라도 독자들은 대개 작업자의 구상 대로 따라가게 된다.
도움이 됐던 재료를 꼽자면 ‘생명’이라 하겠다.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콘셉트 디자이너다. 현실 세계에서 발견한 것들에 영혼의 작은 조각이 더해질 때 창조물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내 작업 과정에 대해서라면 아래의 설명이 아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하든 나의 접근 방식은 우선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적어도 두세 번을 읽는데,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눈물을 마시는 새>의 경우에는 만만찮은 일이었다. 읽는 동안 내 머릿속은 마치 영화를 볼 때처럼 이미지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읽으면서 그런 이미지들을 스케치하려 해봤자 반딧불이를 잡는 것과 매한가지다. 소설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나는 큰 감동을 일으키는 부분에 특히 주목한다. 눈물, 박장대소, 나도 모르게 궁둥이가 들썩이는 흥분을 자아내는 부분들이 바로 그 이야기와 내가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연결되는 지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먼저 그린다. 그것들을 통해서 다른 모든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이어지도록 말이다.
크래프톤의 놀라운 아트 디렉터 손광재가 자신만의 통찰과 그것이 어떻게 이야기와 연계되는지 내게 공유해주면서 이 과정에 힘이 실렸다. 그런 덕분에 우리의 디자인에서 특별하고도 독자적인 무언가를, 작가가 자랑스러워하고 관객들이 기뻐했으면 하는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소설 속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한 일러스트를 책에 담았는데,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장면은 뭐였는지 궁금하다. 그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답변에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음)
=내가 생각하는 가장 강렬한 순간은 심장탑 꼭대기에서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다. 사모 페이가 케이건에 맞서 그녀의 종족들을 살려주는 대가로 그의 눈물을 마시겠다고 제안하는 장면이다. 케이건이 하텐그라쥬와 나가를 파괴하기 위해 소환한 거대 토네이도 폭풍의 혼란 속에 티나한과 비아스의 맹렬한 소란이 벌어지고, 피를 뒤집어쓴 가여운 비형의 폭주가 임박하고, 그 외에도 사랑스러운 여러 등장인물이 고통을 받는 그 순간에 사모의 희생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이영도 작가의 작품에는 도깨비, 두억시니 등 한국적 소재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이야기가 잘 쓰여졌다면 그 속의 등장인물이나 개념이 친숙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서구권에서 처음 접하는 신들, 괴물들, 종족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영도는 가장 낯선 캐릭터에조차 대단한 공감과 연민을 담아낸다. 그래서 결국 그 인물이 겪는 갈등과 처지가 나 자신의 삶과 깊이 연결돼 버린다.
▶위 질문과도 연결될 텐데, 한국 콘텐츠 지적재산권(IP)의 강점이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아는 한국의 판타지 작품은 아무리 환상적이더라도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눈물을 마시는 새> 속에는 풍부하고도 상징적인, 깊은 결함이 있지만 가능성을 잔뜩 품은 등장인물들이 넘친다. 그들의 투쟁을 그린 이영도의 연대기는 지혜로우면서도 논쟁적이며, 끔찍하면서도 충격적이며,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재미있다.
장담하건대 소설 속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떼어내도 그것을 얼마든지 거대한 멀티미디어 프렌차이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스타워즈', '어벤저스' 등 대작 영화의 기틀을 세우는 콘셉트 디자인을 해왔다. 어떻게 콘셉트 디자이너를 꿈꾸게 됐나.
=사실 나는 어려서는 비밀 요원을 꿈꿨다. 하지만 열 네 살 당시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대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고 그림이 있는 책이 더 재미있다는 생각에 내 이야기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영화계에서 콘셉트 디자이너가 돼있었다. 얄궂게도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는 몇 년 동안 시각화 작업에 매진해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때로는 개봉 시점에도 말을 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일종의 비밀 요원이 된 셈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 다수에 참여했다. 스스로 꼽는 본인의 대표작은 무엇인가.
=내게 있어 최고의 작품은 늘 차기작이다. 그런 자세가 40년이 넘은 지금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디자인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 '스타워즈' 속 아미달라 여왕 복식 등은 동양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동양 전통 문화나 복식에도 관심이 많은지.
=이제 여러분에게 공개하겠지만 나만의 비법이 있다. 우선 이야기를 읽는다. 만약 이야기가 없는 작업이라면 내가 지어낸다.
그러고 나서 종이과 펜을 쥐고 푹신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이야기에서 생각나는 것을 모두 그린다. 눈을 반쯤 감고 그릴 때가 종종 있다. 마치 종이 위에서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끝나면 그 100여 개의 이상한 스케치들 중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내가 개선하고 싶은 점을 적어가며 추려낸다.
그 다음엔 실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연구를 시작한다. 만약 가상의 문화라면 그와 유사한 형태를 찾아본다.
아미달라 여왕의 경우를 예로 들면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의 의상과 패션이 왕족을 묘사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식이다. 적어도 세 곳(몽골, 일본,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영국 왕실)에서 얼굴을 하얗게 칠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나는 보편적이고 상징적인 뭔가를 찾아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 끝에 마지막으로 최종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그림은 실제 삶에서 얻은 지식에 나의 상상력을 결합한 결과물이다. 여러분이 전 과정을 숨긴 채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냐'며 궁금해할 것이다. 여러분이 비법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말이다(앗, 말해버렸네).
▶서구권에서 판타지 콘텐츠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위해 동양의 전통적 요소를 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에 대해 오리엔탈리즘, 즉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생기는 현상이라는 비판도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창작자들이 게으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주하지 않고 갖다 쓰는 것은 분명 나쁜 습관이다. 반면에 다른 문화와 역사적 시대에서 영감을 찾고 예술가로서 여러분의 상상력과 목소리를 불어넣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것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므로, 괜찮다고 본다.
▶디자인 영감을 얻기 위해 어떤 종류의 책을 즐겨 읽는지. 특히 좋아하거나 아끼는 책과 그 이유를 들려준다면.
=책은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삽화와 이야기로 내 머릿속을 채우며 자랐다. 메리 셸리, 프랭크 허버트, 어슐러 르 귄, 존 콜리어, 테리 윈들링, T. H. 화이트, 닉 세이건, 레이먼드 챈들러, 마거릿 애트우드를 비롯한 많고도 많고도 많고도 많은 작가들이 있었다.
요즘에는 모든 장르의 책을 탐독한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다. 20년 후에도 지금처럼 살아있기를바라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게임을 위한 콘셉트 디자인을 하는 과정은 영화 콘셉트 디자인과 어떤 점이 다른가. 게임의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 포인트가 있다면.
=사실 별 다를 게 없다. 손광재 크래프톤 아트 디렉터와 크래프톤이 나를 믿고 많은 재량권을 줬다. 그런 환경은 언제나 예술가에게서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낸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아이디어와 예술, 또한 책 자체를 논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늘 이야기가 우리를 인도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동안 손광재 아트 디렉터는 그의 유능한 팀과 앞장서서 우리의 디자인을 게임 속에 구현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협업이었다. 내가 아는 최고의 협업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구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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