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잘나가던 외국계 은행을 그만두고 35세였던 1988년 인천 주안의 수출산업단지에 회사를 세웠다. 7명으로 시작한 공장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최근의 코로나19 사태까지 견뎌내면서 연간 수출액만 3500만달러가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L회장의 얼굴엔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생산성과 품질, 비용 모든 면에서 한국과 베트남은 비교가 안 된다”고 했다.
대기업은 예외일까. 현대자동차 해외 사업장의 생산성과 수익성은 한국 공장을 추월한 지 오래다. “솔직히 말하면 현대차 국내 근로자의 고임금은 해외 공장 생산직을 착취한 대가나 다름없다”는 게 업계 사정에 밝은 경제단체 고위 관계자의 실토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다.
한국무역협회의 최근 조사 결과를 보면 1년 새 ‘단위노동비용 증가율’은 비교 국가에 비해 12계단 상승해 10위에 올랐다. 미국, 유럽 선진국을 제외하면 최상위권이다. 일본을 넘어선 지 오래다. 반면 노동생산성은 30위로 뒤처졌다.
10년 전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극찬하던 해외의 시각도 사뭇 달라졌다. 2012년 모건스탠리에서 신흥시장을 총괄하던 루치르 샤르마는 10년 후 세계 경제를 주도할 ‘브레이크아웃 네이션(Breakout nation)’으로 한국을 꼽았다. 그는 세계 경제의 운명을 바꿀 국가로 20여 개를 추린 뒤 이들이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를 대신할 것이라며 그중에서도 한국이 단연 금메달감이라고 추켜세웠다. 당시 정부도 “한국이 세계 경제의 맥박이며, 제조업 부문 경쟁력 등을 강점으로 언급했다”고 반색했다.
과연 10년이 지난 지금 그 예언은 현실이 됐는가. 모건스탠리가 2012년 당시 향후 세계를 이끌 선도국으로 한국을 꼽은 핵심 요인은 제조업 경쟁력이었다. 대만은 물론 일본을 능가한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올해 성장률은 물론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도 대만에 역전당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내년 전망은 더 우울하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1% 성장도 위태하다”고 할 정도다.
만약 모건스탠리가 지금 브레이크아웃 국가 리스트를 바꾼다면 한국은 남을 수 있을까. 비관적이다. 10년 전 한국을 ‘세계 경제의 바로미터’라고 극찬한 샤르마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쓴 칼럼에서 올해 세계 경제 불안 속에서도 고성장을 질주하는 7개의 경이로운 국가를 거론하며 베트남을 첫 번째로 꼽았다.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대란이 아니더라도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 52시간제 등 노동 규제와 높은 법인세율, 노조 리스크에 더해 갈수록 줄어드는 노동력을 감안하면 상황은 암담하다.
“제조업 경쟁력의 추락을 방치하다간 글로벌 선도국가는커녕 당장 내년도 장담할 수 없다.” 수십년간 수출 현장을 지키며 한국 경제의 허리를 지탱해온 중견기업인들의 우려다. 제조업 없이는 한국의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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