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에 다니는 A씨는 최근 중고제품 거래사이트 당근마켓을 둘러보다 두 눈을 의심했다. 삼성생명이 최근 임직원과 VIP 고객용으로 제작한 ‘이중섭 달력’이 매물 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매가격은 6만원으로, 임직원몰 판매가(2만4000원)의 두 배 이상이었다. 기업들의 달력 제작 방식이 ‘고급화·소량 제작’으로 바뀌면서 공급이 줄었지만 이런 고급 달력을 찾는 수요는 늘어난 결과다.
‘달력=공짜’란 상식이 깨지고 있다. 대량으로 찍어 마구 뿌리던 종이 달력은 스마트폰과 디지털 캘린더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있다. 반면 미술작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크게 늘면서 ‘명품 달력’을 찾는 이는 오히려 증가했다. “달력은 이제 날짜를 확인하는 용도가 아니라 그림 액자 대용품이 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중고 달력에 프리미엄이 붙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시작은 1995년 김환기 작품으로 한정판 달력을 선보인 리움미술관이었다. 이후 리움이 매년 내놓은 한정판 달력은 해가 바뀐 뒤에도 액자 안에서 숨 쉬었다. 당근마켓에 나온 ‘이우환 달력’은 나폴레옹이 문서보관용으로 썼다는 100% 순면의 프랑스산 수제 종이 아르슈지를 사용하고 인쇄 방식도 일반 프린트가 아니라 판화 기법을 쓴 덕분에 중고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미술계 관계자는 “이우환 그림은 이제 판화로도 구하기 어렵고 가격이 2000만원대를 넘는다”며 “그래서 리움이 10년 전 제작한 500점 한정 달력의 희소성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리움이 시작한 ‘VIP 달력 마케팅’은 다른 기업과 갤러리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리움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VIP 달력 제작을 중단했다. 리움은 내년 달력도 거장이 아니라 신진 작가들에게 맡겼다. 김용관 작가(42)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12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대부분 1980년대생이다.
미술계에선 내년 달력의 키워드로 다양성을 꼽는다. 명화 중심에서 신진 작가와 새로운 장르로 변화하는 양상이 뚜렷해져서다. 주제도 환경, 일상, 자연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테마로 바뀌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은 ‘오하이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정윤아 작가(37)의 일러스트로 새해 달력을 제작했다. 그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과 풍경을 따뜻하게 그려 호평받고 있다. 수출입은행은 ‘나무’ ‘사막’ 시리즈로 유명한 이명호 사진작가의 나무 그림으로 달력을 채웠다.
명작을 주로 썼던 우리은행은 김경균, 윤예지 작가의 그림으로 달력을 제작했다. 김 작가는 해안에 버려진 유리병 등을 모아 대형 설치작품 등을 제작해온 예술가다. 윤예지 작가는 동물과 환경 이야기를 일러스트로 풀어왔다.
하나은행은 생명과 행복의 힘을 예찬하는 작가 임성숙의 총천연색 작품을 달력에 담았다. ‘겨울이야기’ ‘정겨운 마을’ 등 대표작이 실렸다. 장지 위에 옛 고향의 풍경을 작은 점들로 채색하는 한국화가 정영모는 국민은행이 점 찍은 올해의 작가다. VIP 전용 판화 달력은 따로 출시했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올해 화제가 된 전시나 새로 소장한 작품들로 내년 달력을 채웠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연말 전시와 연계해 키키 스미스 작가와 예술서점 ‘더 레퍼런스’가 함께 만든 달력을 내놨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장욱진, 박노수 등 새로 소장한 작가의 작품을 내세웠다. 대전시립미술관은 올해 20년 만에 전용 전시관을 개관한 ‘백남준 프랙탈 거북선’을 테마로 달력을 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전에 전시했던 십장생도, 구담봉 등의 작품들을 계절별로 채웠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는 작가들은 자체 소량 제작한 그림 달력도 판매하고 있다. 신철, 이지우, 솔하, 정민희 등의 작가가 자체 계정을 통해 대표작 12점이 포함된 달력을 내놨다.
김보라/이선아/성수영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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