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왕따' 시키는 일본과 대만…배후엔 '이곳' 있었다 [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입력 2022-12-24 17:00   수정 2022-12-24 19:25


'반도체 밀월'로 불리는 대만과 일본의 관계가 점점 끈끈해지고 있다.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TSMC는 일본 구마모토현에 총 1조2000억엔(약 11조6000억원)을 들여 생산라인을 건설 중이다. 일본 정부가 건설 비용의 40%를 지원한다. 지난 4월 착공했고 내년 9월에 준공, 2024년 말부터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기업 소니는 TSMC 공장 옆에 '이미지센서'(사람의 눈 역할을 하는 반도체) 생산 라인을 지을 계획이다. TSMC에서 생산된 칩을 받아 옆 공장에서 바로 센서를 완성하려는 목적이다.

최근엔 TSMC 고위 관계자가 일본에 제2공장을 건설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허우융칭 TSMC 아시아·유럽 지역 영업 담당 수석 부사장은 지난 8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지난 9일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추가 건설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영한다”고 했다.

일본은 사실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기에 최적의 위치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주 발생하는 지진 때문이다. 키오시아 같은 일본 반도체기업의 생산 라인은 지진 때문에 멈추기 십상이다. 지난 3월 진도 7.6 규모 지진 때문에 키오시아 최첨단 낸드플래시 생산 라인에 오염이 발생한 게 최근 사례다. 이 영향으로 키오시아의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10%가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오시아의 시장점유율은 1분기 2위에서 2분기 3위로 떨어졌다.
TSMC의 일본 공장 건설, 배후엔 애플
그런데도 TSMC가 일본 공장 건설에 적극적인 이유가 뭘까. 겉으로 보기엔 일본 정부가 살포하는 거액의 보조금, 오랜 고객사인 소니와의 협업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이면을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 만난 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는 "TSMC가 일본 공장을 건설하는 진짜 이유는 '애플'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애플은 TSMC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No. 1' 고객이다. 지난해 기준 TSMC의 매출에서 TSMC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5%다. TSMC 입장에서 애플은 놓쳐서는 안 되는 '큰 손' 고객이다. 애플의 입김에서 TSMC가 자유로울 수 없다.

애플은 요즘 폭스콘 같은 협력사들에 '탈(脫) 중국'을 주문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예측 불가능한 정책 때문에 애플이 최근 들어 여러 차례 생산 차질을 겪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정저우 봉쇄 조치로 아이폰을 생산하는 폭스콘의 공장 운영에 차질이 생긴 게 대표적인 사례다. 애플은 폭스콘에 "핵심 생산 라인을 중국에서 인도 등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중국 못 믿는다"…'탈 중화권' 압박
애플의 압박은 TSMC에도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애플은 아이폰, 맥북의 핵심 반도체를 만드는 TSMC의 공장이 대만에 몰려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에 하나 중국의 침공으로 TSMC의 최첨단 공장이 붕괴한다면, 애플엔 '재앙' 수준의 피해가 닥칠 수 있어서다.

그래서 애플은 TSMC에도 '대만을 떠나 생산지를 다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짓는 것도 애플의 협력사 '탈 중국' 유도 정책의 연장선상으로 분석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TSMC-소니-애플로 이어지는 삼각관계를 살펴야 한다.

소니의 주력 제품은 전자기기에서 사람의 눈 역할을 하는 이미지센서다. 소니의 이미지센서는 애플에 납품된다.

소니는 이미지센서의 핵심 칩을 TSMC에서 생산한다. 애플 입장에서 TSMC의 공장에 문제가 생기면 소니의 이미지센서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결국 아이폰 판매에 타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애플이 TSMC를 압박해 일본에 공장을 짓게 했다는 것이다. TSMC 구마모토 공장이 완공되는 2024년이 되면 애플은 소니의 '이미지센서' 관련 걱정은 놓게 된다.
애플 "미국산 칩 쓰겠다"
문제가 다 풀린 건 아니다. 애플이 직접 개발하는 아이폰·맥북용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도 대만에 있는 TSMC 공장에서 생산된다. 애플의 AP는 소니가 납품하는 이미지센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미국 정부는 TSMC를 압박해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공장을 짓게 했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등 TSMC 최고위 경영진은 "대만 생산이 유리하다. 굳이 미국에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반말했지만, 미국 앞에서 뜻을 접었다. TSMC는 수십조원을 투자해 현재 피닉스에 4nm 생산라인을 짓고 있다. 팀 쿡 애플 CEO는 최근 열린 이 공장의 장비 반입식에서 "애리조나 TSMC 공장의 첫 고객이 될 것"이라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애플은 대만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 놀라운 소식은 TSMC가 공장을 미국에 하나 더 짓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공정도 4nm가 아닌 최신 3nm로 예상된다. 여기에도 애플의 거부할 수 없는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탈 대만을 부담스러워했던 TSMC가 일본, 미국에 투자를 늘리는 건 '애플'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며 "가장 큰 고객(애플)의 압박에 TSMC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분석했다.
'슈퍼파워' 애플과 대등한 협상, 삼성전자 정도만 가능
이처럼 강력한 애플의 슈퍼파워에 대항할 수 있는 기업은 흔치 않다. 한국에선 삼성전자 정도가 애플과 비교적 대등한 위치에서 납품 협상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애플은 세계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반도체 시장에선 다르다. 애플은 삼성전자로부터 D램,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를 납품받는다. 물론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 삼성전자의 대체 업체도 있다. 하지만 '품질'을 따지는 애플의 1순위는 삼성전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자국으로 유치하려는 각국의 경쟁도 치열하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은 수조 원의 돈 보따리를 챙겨 놓고 삼성전자에 "우리나라에 공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20% 넘는 세액공제도 약속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 상황은 다르다. 삼성전자는 경기 평택에 1~3공장을 준공했고 곧 4~5공장은 기초공사에 들어갔다. 6공장 건설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공장마다 20조원 넘는 거액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이다.
전 세계가 반도체산업 육성 팔 걷었는데…거꾸로 가는 한국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대기업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현행 6%에서 20%까지 높이는 반도체 특별법을 밀어붙였다. 자국에 투자하는 기업에 25% 세액공제 혜택을 주기로 한 미국과 2025년까지 187조원을 들여 반도체산업 육성에 나선 중국 등과 경쟁하려면 파격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때다.

결과는 '기대 이하'다. 여야는 지난 23일 대기업 세액공제율을 6%에서 8%로 2%포인트 올려주는 데 그쳤다. 법인세 세수 감소를 들어 반대한 기획재정부와 대기업 특혜를 내세운 더불어민주당, 미온적으로 대처한 국민의힘이 만들어낸 초라한 결과다.

양 의원은 별도 입장문을 내고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에 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는 25%”라며 “(여야가 합의한) 8%는 전진이 아니라 후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한국에서 쫓아내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에 공장을 지으면 25%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떤 기업이 한국에 공장을 지으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양 의원은 “세액공제 8%로의 후퇴는 지난 대선 공약을 파기하는 수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반도체업계에서도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반도체는 전략적 가치가 있음에도 경쟁국에 비해 혜택이 적다”며 “전쟁에서 무기 만드는 돈을 아끼는 격으로,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에 굉장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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