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수출통제를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무기’로 쓰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명분은 ‘안보 위협’이다. 미국이 동맹국과 함께 중국 러시아 등 전략적 라이벌을 상대로 포괄적 수출통제에 나서면 탈냉전 이후 안정적으로 유지돼온 ‘바세나르체제(다자간 전략물자 수출통제체제)’는 균열이 불가피하다. 무역 비중이 크고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고민이 커지게 됐다.
○트럼프도, 바이든도 ‘수출통제’
미국이 한국 일본 유럽연합(EU) 호주 등 주요 우방국에 신(新)바세나르체제의 의사 타진에 나선 건 수출통제를 대중 견제 전략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때 수출통제에 시동을 걸었다. 경제안보를 명분으로 폭넓은 수출통제 조치를 발동할 수 있도록 2018년 수출통제개혁법(ECRA)을 제정하면서다. 미국은 2019년 5세대(5G) 통신장비 시장 강자이던 중국 화웨이로의 반도체 수출을 막았고, 이후 중국 최대 반도체기업 SMIC까지 제재 명단에 올렸다. 미국의 제재 효과는 컸다. 미국의 기술패권을 위협하던 화웨이는 매출 급락을 겪으며 치명상을 입었고 SMIC의 반도체 개발도 타격을 받았다.
올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이 수출통제 정책을 우방국으로 확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이 수출통제의 근거로 내세운 안보 위협이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 경제 제재에 이어 지난 10월에는 중국에 고성능 컴퓨팅 칩과 소프트웨어, 반도체 장비 수출을 금지했다. 칩4(미국 한국 대만 일본의 반도체 협의체)와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통해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재편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신바세나르체제도 이런 중국 견제의 연장선이다.
○‘신냉전’ 돌입한 세계
바세나르체제는 탈냉전 이후 1996년 출범한 다자간 수출통제협의체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4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지금의 바세나르체제는 미국이 수출통제를 확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의사결정 방식이 만장일치제인데, 러시아가 중국에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가 꼽힌다. 우선 바세나르체제에서 이탈해 미국과 우방국 중심으로 새 수출통제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단순 수출통제뿐 아니라 유사시 우방국과 함께 중국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기존 바세나르체제를 유지하면서 만장일치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거나 중국에 우호적인 러시아 등을 바세나르체제에서 쫓아내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러시아 등이 반발할 가능성이 커 기존 틀을 바꾸기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이 신바세나르체제를 모색하는 것은 신냉전 체제가 본격화하는 신호탄이다. 미국은 지난 10월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수출통제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정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는 “트럼프 시절에는 무역전쟁에 안보를 끌어들였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안보 위기가 가시화하고 있는 최근의 국제 정세는 미국이 우방국을 수출통제에 끌어들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말했다.
○고민 커진 한국
한국은 바세나르체제 유지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우방국끼리 따로 모여 수출통제체제를 만드는 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데다, 수출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더 큰 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바세나르체제가 26년간 안정적으로 작동해온 만큼 각국의 이해관계를 만족시키는 새 국제질서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도 깔려 있다.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수출통제 대상은 안보이익과 직결되는 기술에 한정할 필요가 있다”며 “수출통제가 기업 이익과 충돌한다는 점도 정부가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