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기업 원산지 표시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관세사의 직무 범위를 확대하려는 정부 법안이 국회 본회의 처리 마지막 문턱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멈춰섰다.
해당 업무가 변호사의 직무 영역을 침해할 수 있다는 대한변호사협회의 주장을 법사위가 받아들인 것이라 논란이 되고 있다.
법사위 "관세사 직무 확대하면 변호사법 위반"
28일 정치권에 따르면 법사위는 전날 전체회의에서 타 상임위에서 체계·자구 심사를 의뢰한 비쟁점 법률안 23건을 심의해 한국전력공사법 개정안 등 20건을 의결했다.법사위를 통과한 이들 법안은 여야 간 특별한 이견이 없어 28일 오후 열리는 본회의에서 통과가 확실시된다.
그런데 법사위는 관세사법 개정안 등 3건은 의결하지 않고 추가 논의를 위해 법안심사2소위원회로 회부했다.
법사위 2소위는 타 상임위 법안 중 헌법이나 다른 법률과 충돌할 위험이 있는 법안을 추가로 심사하는 곳이다. 법안이 2소위로 회부되면 논의가 크게 지연되면서 통과 여부를 기약할 수 없어 ‘법안의 무덤’이라고도 불린다.
국회 안팎에서는 정부안이자 여야 합의로 상임위를 통과한 관세사법 개정안 처리가 불발된 것을 두고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정부가 지난 9월 국회에 제출한 관세사법은 관세사의 직무 범위에 대외무역법에 따른 원산지 표시·증명·판정과 관련된 신청 대리, 상담, 자문에 대한 조언 등 업무를 추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행 관세사법은 관세사의 직무 범위로 수출입 물품의 통관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관세 관련 업무(세액 계산, 심사·심판청구, 상담 자문 등)를 열거하고 있다. 다만 원산지 표시 관련 업무에 대해선 특별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기획재정부는 “원산지 표시 관련 업무는 통관·무역 관련 전문성이 필요하므로 관세사를 통한 업무지원이 필요하다”며 개정안 취지를 설명했다.
대외무역법에 따르면 수출입기업은 물품의 원산지를 표시해 증명서를 제출할 의무와 원산지 판정을 정부에 요청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와 관련된 업무는 현재에도 관세사들이 기업의 통관절차를 대행하면서 수행하고 있는 만큼 관세사를 통해 안정적으로 상담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기재부 의견이다.
관세사법 개정안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여야 간 별다른 쟁점이 없었다. 지난 26일에는 여야 합의로 기재위를 통과했다.
다만 기재위 전문위원 검토 과정에서 “원산지 표시 관련 업무를 관세사 외 다른 누구나 할 수 있도록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됨에 따라 이를 반영한 수정안이 마련됐다.
본회의 처리를 하루 앞둔 27일 열린 법사위 전체회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국민의힘 간사인 정점식 의원은 관세사의 직무 범위를 원산지 관련 업무로 확대한 조항에 대해 “일종의 법률행위 대리 부분인데 이것은 특별히 다른 직역에서 대리하지 않는 한 변호사의 업무로 규정돼 있다”며 “(해당 조항은)변호사법 109조 1호에서 말하는 ‘그 밖의 법률사무’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은 “(해당 업무는)변호사들도 당연히 할 수 있다”며 “다만 변리사나 세무사들처럼 일반적인 관세법상 업무는 관세사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 의원은 “관세사의 고유한 직무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며 “2소위로 넘겨 조금 더 검토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결국 김도읍 법사위원장은 정 의원 의견에 따라 관세사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고 법안2소위로 회부했다.
법사위 관계자는 “법사위에 아무래도 율사(판사, 검사, 변호사 등) 출신들이 많다 보니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 의원 지적에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기재부 "변호사가 할 업무 아닌데..."
정치권에서는 “변협이 법안 통과 직전 관세사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의견을 국회에 보내오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는 말이 나왔다.변협은 기재위 조세소위에서 관세사법에 대한 논의가 이미 마무리된 이달 5일 기재위와 법사위에 “관세사에 변호사만 가능한 법률행위 대리를 허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기재위를 통과한 법안이 하루 만에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리자 기재부는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원산지 업무는 이미 관세사들이 하던 업무고 다른 자격사 중에는 해당 업무를 하는 분들도 없다”며 “통관절차에 따라 진행되는 업무라 변호사가 도중에 들어와서 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저희가 법안을 입법예고 하면서 법무부나 다른 부처에도 의견조회를 다 했다”며 “이 과정에서 변협은 물론 타 부처에서도 아무런 의견 제시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변협은 "기재부는 변협에 의견조회를 한 사실이 없다"며 "변협은 기재위와 법사위는 물론 법무부에도 의견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기재부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수출입기업 원산지 업무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도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그동안 기업들로부터 원산지 업무와 관련한 민원이 엄청나게 쏟아져 업무를 누가 하는지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며 “그래서 산업통상자원부와 관세청 의견에 따라 법 개정을 추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세사 단체인 한국관세사회는 법사위 결정에 강력 반발했다. 관세사회 관계자는 “아주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며 “원산지 업무를 관세사가 독점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로 해놓은 건데 대외무역법이 들어간 걸 가지고 관세사는 안 된다는 식으로 트집을 잡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일자 정점식 의원실 관계자는 “저희가 (법안이 통과 안 되도록)법사위에서 잡고 있겠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며 “상임위서 의견 개진을 못했던 분들이나 이익단체가 있다면 일단 2소위로 내려보내 거기서 이분들끼리 의견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정 의원은 관세사법 개정안을 논의할 법안2소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아직 법안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저희가 심도있게 보지는 않았다”며 “내년에 2소위가 언제 열릴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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