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자식들은 대개 이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를 닮고 싶지만, 아류가 되지는 않겠다고. ‘미니멀리즘 조각의 대가’ 토니 스미스의 딸 키키 스미스(68)도 그랬다. 아버지의 대표작인 단순하고, 딱딱하고, 무거운 사각형 모양의 조각을 보고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이렇게 다짐했다. “아버지가 강한 예술을 했다면, 나는 약한 예술을 하겠다.”
이후 키키 스미스는 ‘약한 예술’로 세계 조각계의 별이 됐다.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미스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자유낙하(Free Fall)’를 관통하는 키워드도 바로 ‘취약함’이다. 조각, 판화, 사진, 태피스트리 등 14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스미스는 연약하고, 더럽고, 금기시된 인체의 본모습을 내보인다.
스미스는 여성의 몸을 다뤘다. 내장, 생리혈, 배설물…. 도저히 예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재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의 초기작인 ‘소화계’(1988)를 보면 알 수 있다. 혀부터 항문까지 이르는 사람의 내장을 주철로 만들어 벽에 그물처럼 걸어놓은 작품이다. 사람 몸 안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미술관 2층에 있는 조각 작품 ‘무제Ⅲ(구슬과 함께 있는 뒤집힌 몸)’(1993)도 마찬가지다. 허리를 구부린 사람 주변에는 구슬이 꿰어진 실이 펼쳐져 있다. 인간의 몸에서 나온 배설물을 구슬로 표현한 것이다.
소재뿐만이 아니다. 딱딱한 철, 나무 등을 사용하는 보통 조각가들과 달리, 스미스는 부드럽고 망가지기 쉬운 재료를 사용한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성의 몸을 본뜬 조각 작품 ‘허니 왁스’(1995)는 밀랍을 사용했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재료를 통해 인체의 취약성을 표현했다.
종이도 스미스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1980~1990년대만 하더라도 종이로 된 작품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미국 작가들은 쉽게 찢기고 망가진다는 이유로 종이를 작품의 재료로 잘 사용하지 않았다. 스미스에게 영감을 준 것은 ‘한지’였다. 그는 “한국에선 한옥 바닥에 한지를 깔아 열을 보존한다는 것을 안 후부터 종이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여러 겹의 종이를 이어 붙인 드로잉과 판화 작품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찢어지기 쉬운 종이의 특성을 활용해 인간의 취약함을 표현한 것이다.
소재도, 재료도 취약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역설적으로 사회에 대한 저항이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취약하고 더러운 부분을 밖으로 꺼내 보여주는 것. 그것을 통해 스미스는 ‘여성의 몸은 고결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통념을 깼다. 늑대의 배를 가르고 나오는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한 ‘황홀’(2001)처럼 스미스는 사회의 통념을 부수고 당당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예술을 통해 통념을 뒤집어온 스미스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자유낙하’라고 표현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그가 1994년 만든 판화 작품의 이름이다. 높은 곳에서 어디론가 떨어지는 여성은 떠밀린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스미스는 줌 인터뷰에서 “자유낙하는 자기 자신과 작품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며 “어디로 가든지, 내가 두려움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자유낙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