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에 10개 넣으면 8개 부숴 도예에는 요행이란 없습니다"

입력 2022-12-29 17:50   수정 2022-12-30 02:27

경북 문경 주흘산의 문경새재 방향에서 흘러나오는 하천을 거슬러 30분쯤 걷다 보면 가마터가 하나 나온다. 문경에서만 300여 년간 9대째 백자를 빚어 온 영남요. 흰 눈 쌓인 소나무 몇 그루를 지나가자 흙내음 가득한 작업장이 눈에 들어온다. 물레간 한쪽에선 이곳의 주인장 백산 김정옥 사기장(82)이 물레 밑동을 맨발로 치며 달항아리를 빚고 있다. 흙과 물이 만나 달이 되는 과정이다.

9대에 걸쳐 이어온 도공의 길
영남요에선 도자기를 굽는 모든 과정에 전통 기법을 사용한다. 발 물레부터 전통식 ‘망댕이(식용 무를 일컫는 영남 방언) 가마’까지 흙과 물, 나무, 불 등으로만 백자를 빚어낸다. 기계를 멀리하는 것은 영남요 7대 도공(陶工)인 김 사기장이 65년째 지켜온 고집이다. 그의 고집에는 가업을 오롯이 지켜가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김 사기장은 달항아리, 다완(찻사발) 등 백자를 빚고 있다.

그는 전통 기법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매진해왔다. 조선 영조시대 때부터 대대로 내려온 나무 물레 앞에서 하루 8시간가량 그릇을 빚는다. 전기 물레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김 사기장은 “좋은 백자는 너무 무거워도 안 되고, 너무 얇아도 안 되는데 최적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나무 물레가 좋다”며 “완벽한 백자를 빚어내기 위해 전통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자기를 굽는 과정도 중요하다. 할아버지부터 손주까지 3대가 노심초사하는 시간이다. 가마에 넣기 전에 늘 고사를 지낸다. 불 조절에 실패하면 정갈한 백자가 나오지 않는다.

전통 가마인 망댕이 가마에 소나무 땔감을 넣어 섭씨 1300도를 맞춘다. 이 온도를 18~24시간 동안 유지한다. 수은주는 따로 없다. 사기장이 불길을 내내 지켜보며 땔감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식이다. 초벌구이를 거친 백자도 폐기하는 게 다반사다. 10개를 가마에 넣고 구우면 7~8개는 부수는 편이다. 달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경북 민속자료로 지정된 망댕이 가마는 우리나라 특유의 전통가마로 무 모양의 흙덩어리를 경사로에 따라 5~6칸씩 쌓은 가마를 일컫는다. 불길 흐름을 부드럽게 해주는 망댕이 가마를 거친 백자 표면에는 순백색 빛이 감돈다. 김 사기장은 “백자의 색은 불이 결정한다. 전기, 가스 등을 사용했을 때는 전통 가마와 같은 색감이 나오지 않는다”며 “일평생 해온 일이지만 불을 아는 건 쉽지 않다.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불을 다루는 건 오직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예(藝)에는 요행이 없다
65년의 도력(陶力)을 자랑하지만 김 사기장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진 건 1987년부터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두 차례 연속 받으면서다. 전통을 고수한 끝에 1991년 대한민국 도예 명장 1호로 선정됐고, 1996년엔 국가무형문화재 105호라는 영예를 얻었다. 국내에서 도자기 관련 무형문화재는 김 사기장이 유일하다.

마침내 세계인이 그의 백자에 홀리기 시작했다. 1996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회를 개최한 뒤 캐나다 온타리오 왕립박물관, 베를린 쾰른 동아시아박물관,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기 박물관 등에 그의 백자가 놓였다. 1999년 달라이 라마가 한국을 찾아왔을 때, 2010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백산의 작품이 선물로 쓰였다.

1960년대 저렴하고 가벼운 스테인리스 그릇 등이 양산되면서 가업이 끊길 뻔했다. 백자가 헐값에 팔리거나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김 사기장은 우직하고 꿋꿋하게 백자를 빚고, 구웠다.

300년 역사 가업은 이제 백산의 아들인 김경식 영남요 대표(56)와 손주 김지훈 씨(27)가 이어가고 있다. 김 사기장이 아들과 손주에게 도예를 전수하며 강조하는 건 단 하나다. 예에는 요행이 없다는 것. 김 사기장은 도공의 길을 이렇게 요약했다. “도예에 ‘적당히’란 단어는 없습니다. 정직함과 자연스러움이 백자에 배어나려면 땀과 집념이 필요하죠.”

문경=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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