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룰을 보고 선수가 거기에 맞춰 경기를 하는 것이지 매번 선수에게 룰을 맞추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012년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대선 경선을 앞두고 한 말이다. 비박(비박근혜) 후보들이 경선 룰로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 경선제)’를 요구한데 대해 이렇게 반격한 것이다. 비박계 후보들은 박 위원장의 독주 체제가 굳어지자 당헌·당규에 규정된 ‘2 : 3 : 3 : 2(대의원·당원·일반국민·여론조사)’ 경선 반영 비율을 바꿔 민심을 대폭 반영한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거셌다. 박 위원장 중심으로 구축된 공고한 당내 판도를 뒤흔들자는 심산이었지만 이들이 뜻을 관철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당 대선, 대표, 광역단체장 경선 때마다 당심(黨心)과 민심(民心) 반영 방식과 비율을 놓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일반 국민이 정당 경선 참여에 물길을 튼 것은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다. 민심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 당 대의원과 당원 투표 50%, 일반 국민 선거인단 50%를 각각 반영하는 국민 참여 경선제를 택했다. 이는 당내 비주류였던 노무현 후보가 승리하는 원동력이 됐다. 노 후보는 당원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이 참여한 노사모의 활약과 지지 속에 이른바 ‘노풍(盧風 : 노무현 바람)’을 일으키며 후보에 선출됐다. 당시 국민 선거인단 3만5000명 모집에 약 190만 명이 신청할 정도로 국민 참여 경선은 바람을 일으켰다.
민심 반영 경선이 흥행을 일으키자 한나라당은 2004년 3월 열린 대표 경선 때 여론 조사 방식을 도입했다. 일반 국민 여론 조사 50%와 대의원 투표 50%를 반영했다. 그해 7월 국민 여론 조사 30%, 국민 참여 인터넷·휴대전화 투표 20%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당 대표 경선 방식으로 당원 투표 70%, 국민 여론 조사 30% 골격을 유지해 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은 룰을 놓고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사례로 꼽힌다.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는 선거인단 규모와 국민 참여 비율을 놓고 수개월 동안 공방을 벌였다. 당이 깨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 후보 측은 선거인단을 40만 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내 지지세가 약한 반면 민심에서 앞서 국민 참여를 늘리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면 당내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 박 후보 측은 선거인단 4만 명을 주장했다.
논란 끝에 선거인단 규모를 20만 명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뇌관은 여론 조사 반영 비율이었다. 당시 경선 규칙은 대의원 20%(4만 명), 당원 30%(6만 명), 일반 국민 30%(6만 명), 여론 조사 20%(4만 명)였다. 문제는 선거인단이 모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 후보 측은 선거인단 투표율이 50%라면 여론 조사 결과도 50%인 2만 명만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 후보 측은 4만 명분을 모두 반영해야 한다고 맞서다 박 후보 측 주장에 가까운 것으로 결정됐다. 이런 룰로 치러진 경선 결과는 이 후보의 승리였다. 박 후보는 당심이 많이 반영된 선거인단 투표에서 49.39%를 얻어 이 후보(49.06%)를 따돌렸지만 여론 조사에서 42.74%로 이 후보(51.54%)에게 밀려 최종 합산에서 1.5%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박 후보 캠프에선 룰 결정 싸움에서 민심 반영 비율을 조금만 줄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한탄이 쏟아졌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에선 완전 국민 참여 경선제 도입이 쟁점이었다. 정세균·김두관·손학규 등 비문(비문재인) 후보들이 이를 주장했다. 국민 모두에게 1인 1표를 인정했다. 당 지지세를 굳건하게 확보해 있던 문재인 후보는 당초 이 방식에 반대했지만 명분에 밀려 수용했다. 민주통합당의 바통을 이어 받은 더불어민주당은 2017년 대선 경선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붙었다. 결과는 2012년 완전 국민 참여 경선제와 비슷하게 당원 자격과 관계없이 국민 누구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대선 180일 전 후보 선출’을 규정하고 있는 당헌을 지켜야 한다는 이재명 후보와 연기해야 한다는 다른 후보들이 수개월간 첨예하게 대립하다 당 지도부는 당헌 준수로 결론 냈다.
여론 조사 문구는 주로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단골 논쟁거리가 됐다. 적합도냐, 경쟁력이냐가 매번 쟁점이 됐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적합도를,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경쟁력을 각각 고수했다. 막판 노 후보가 양보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경쟁할 단일 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라는 문구로 합의했다.
적합도는 경쟁 상대 변수를 배제하고 그 후보에 대한 선호도 만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경쟁력은 개인 호불호를 떠나 상대 후보와 싸워 이길 수 있는지 여부를 보고 선택하는 것이다. 실제 여론 조사에서 적합도와 경쟁력으로 물으면 지지율이 달리 나온다. 여론 조사 문구 하나가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 있지만 지지율 0.01% 차이로 승부가 판가름 날 수 있기 때문에 후보들은 쉽사리 양보하기 어렵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고 표현했다.
2023년 3월 8일 열리는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서도 대표 경선 룰을 두고 지루한 공방이 벌어졌다. 논란 끝에 정진석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는 당헌에 규정된 ‘2 : 3 : 3 : 2(대의원·당원·일반국민·여론조사)’ 대표 경선 원칙을 바꿔 100% 당원 투표로 뽑기로 했다. 명분은 ‘역선택 방지’였다. 즉, 여론 조사 과정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대거 참여해 그들의 입맛에 맡는 후보를 대표로 뽑을 가능성을 차단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 반영 비율이 50%가 되면 여론 조사 지지율이 높은 반윤(반윤석열) 후보들이 유리하게 되는 상황을 차단하려는 포석이다. 친윤 후보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국민의힘 지도부가 결선 투표제를 도입한 것도 마찬가지 포석이다. 물론 역선택 방지 주장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남의 당 대표를 뽑는 데 다른 당 지지 성향 국민이 참여해 결과를 왜곡시켜 논란이 된 사례도 있다.
정당의 경선 룰은 대통령과 당 대표, 광역·지방자치단체장 등 나라의 핵심 일꾼들을 뽑는 중요한 규칙이다. 이런 규칙이 이렇게 원칙도 없이 갈대처럼 왔다 갔다 흔들렸다. 여야를 떠나 누구한테 유불리를 따지기 전에 경선 때마다 규칙이 달라지는 것 자체가 한국 정치의 퇴행적·후진적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