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의 개업중개사 백모씨는 최근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집을 매물로 내놓은 한 집주인이 사무실을 찾아와 "왜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냐"며 타박을 놓은 것이다. 이 집주인은 14억원에 집을 내놨지만, 최근 실거래가는 10억원 정도였다. 백씨는 팔고 싶다면 가격을 낮추라고 권했지만 "알아서 파는 것이 중개사 능력이다. 급한 것 없으니 기다리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졸지에 무능력한 중개사가 된 백씨는 "아파트 단지마다 최근 시세 하락을 무시하면서 전고점 가격을 고수하는 집주인이 있다"며 "가뜩이나 매수자도 없는데 시세보다 수억원 비싼 매물을 누가 사겠느냐. 포털에는 매물을 등록해두지만, 매수자에게 권하진 않는다"고 털어놨다.
3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주 서울 아파트 매매수급지수는 63.1을 기록했다. 2012년 7월 부동산원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첫 주 58.3을 기록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매매수급지수가 기준선인 100보다 낮을수록 매도자는 많고 매수자는 적다는 의미다. 수급지수는 조사 기간 내 상대 비교이지만, 집값이 급락했던 2012년과 견줄 정도로 매수심리가 위축됐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포털사이트에서는 전고점 수준의 가격을 고수하는 매물을 아파트 단지마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 전용 84㎡의 가격은 2021년 9월 23억8000만원으로 최고가를 기록한 이후 지속 하락해 지난해 12월 16억5000만원까지 내려왔다. 이 아파트 같은 면적 매물 호가는 실거래가보다 낮은 16억원에서 시작하지만, 전고점보다 높은 24억원까지 여전히 있다.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84㎡도 37억원부터 48억원까지 호가가 형성되어 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로열층 등 우량 매물이 평균 거래가보다 10%가량 비싸게 거래되는 것으로 본다. 한 개업중개사는 "로열동·로열층이나 수리 여부 등이 가격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같은 면적의 낮은 호가보다 40~50% 비싼 가격을 매수자가 납득하긴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마포구 창전동의 한 개업중개사는 "당장 집을 팔아야 하는 집주인들은 낮은 가격이라도 팔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실거주하는 집주인들은 가격을 내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급하게 집을 팔아야 할 유인이 없는 집주인들은 전고점 가격을 고수하려 한다는 것이다.
중개사들은 집값 하락에 불만이 커진 집주인들의 '욕받이'가 됐다는 자조도 나온다. 노원구 월계동의 한 개업중개사는 "10억원을 넘었던 아파트 가격이 최근 6억원대로 떨어졌고, 집을 보겠다는 사람들도 최근 실거래가 수준의 매물만 찾는다"며 "한 집주인은 선호 층이고 수리한 집인데 9억원에 못 팔아주고 있다고 따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가격을 낮추라고 권하면 '가두리 부동산'이라고 매도한다"며 "그냥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것 같다"고도 했다.
일부 집주인들은 시세 회복을 기다린다는 입장이지만, 전문가들은 올해에도 집값 하락이 계속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김효선 NH농협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어두운 경제전망과 금리인상 기조 속에 부동산 시장 침체와 거래절벽이 더욱 심화할 것"이라며 "저성장, 고금리로 부동산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경제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