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토끼는 예민하다. 후각과 청각이 뛰어나고, 경계심이 강하다. 옛 선조들도 그렇게 봤다. 명리학에서 토끼띠는 신중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임기응변에 강하며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뛰어넘는다. 토끼의 날렵한 움직임은 스타트업을 닮았다. 닥쳐오는 파도를 빠르게 넘어서고, 위기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면모는 창업가에게 요구되는 능력이기도 하다. 한경 긱스(Geeks)가 흑묘년을 맞아 세대별 토끼띠(1963·75·87·99년생) 스타트업 대표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시장 전망이 어두워도, 반드시 성장하겠다”는 공통적 결의를 보였다.
토끼띠의 핵심 떠오른 1987년생
1987년생은 올해 만 36세가 된다. 스타트업 창업가로선 그리 어린 편은 아니다. 업력도 대부분 5~7년 이상으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 반열에 오르거나 대기업에 인수합병(M&A)되며 ‘엑시트’ 성과를 낸 창업가들도 적지 않다. 올해도 이들의 방점은 ‘성장’에 찍혀 있다.작년에 LG유플러스 투자로 유니콘 기업에 오른 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 대표는 1987년생 토끼띠다. 그는 “주주와 200만 자영업자에게 느끼는 책임감이 무거워졌다”고 했다. 한국신용데이터는 ‘캐시노트’ 등 소상공인 경영관리 솔루션을 제공한다. 김 대표는 “창업 후 쉬웠던 순간이 하나도 없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버텨내고 견뎌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업의 동력은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때라고 했다. “지난해 유니콘기업에 올랐을 때 과거 자료를 살펴보니, 사업 초창기 세웠던 목표를 여럿 넘어서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신용데이터의 서비스 사업장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약 200만 곳이 됐다. 그가 올해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압박을 겪는 고객들의 비용 절감책을 마련해주는 것이 과제”라고 말하는 이유다.
인테리어 플랫폼 오늘의집 운영사 버킷플레이스는 지난해 5월 2300억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받았다. IMM인베스트먼트,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으로부터 2조원가량의 몸값을 인정받았다. 1987년생 이승재 대표가 창업 8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이 대표는 “올해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용자의 공간을 바꿔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푸드 커머스 업체 쿠캣의 이문주 대표 역시 1987년생이다. 올해엔 오프라인 채널 최적화, 서브 브랜드 확대 등의 신년 목표를 세웠다. 그는 쿠캣이 지난해 1월 GS리테일에 회사를 매각한 이후에도 회사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자리를 잡기까지 곡절은 상당했다. 그의 첫 아이템은 2013년 사용자 추천 기반 지역 정보 서비스인 '모두의 지도'였다. 수익성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2015년 사업을 바꿨다. 쿠캣은 해마다 2배 이상의 연매출 성장을 기록하다가 M&A됐다. 이 대표는 “뒤처지지 않는 의사 결정을 위해선 경영자 스스로 공부하는 치밀함이 중요하다”며 “국내 식품업계의 세대교체 기수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1999년생도 창업 전선으로
1999년생 토끼띠들의 창업도 늘고 있다. 과거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경험을 쌓은 뒤 아이템이 마련되면 창업에 도전하는 것과 다르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도전한다. 올해 목표를 ‘수익화’에 둔 김민준 어웨이크코퍼레이션 대표는 “솔직히 창업에 이른 나이는 아니다”며 “이미 유튜브에선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창업하는 콘텐츠나 커머스 플랫폼에서 물건을 파는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크리에이터 광고 관리 솔루션 ‘크리에이터리’를 운영 중이다. 토스(비바리퍼블리카) 스타트업 서바이벌에 최종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미 회사 매각 경험도 있다. 10대였던 2016년 동탄국제고를 자퇴한 뒤 뷰티 커머스 업체를 창업해 대웅제약 관계사에 팔았다. 그는 “당시 또래들에게 창업은 돈과 재화를 교환하는 행위를 탐구하는 일종의 게임이었다”고 했다. 크리에이터리는 다중 채널 네트워크(MCN)의 역할을 소프트웨어(SW)로 대체하는 서비스다. 광고 관련 업무의 소요시간을 70%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올해 목표는 본격적인 수익화”라고 전했다.
동갑내기인 파프리카데이터랩의 김유빈 대표는 “온전히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청춘이 아깝지 않은 모험”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화여대 창업 전문 전공인 ‘기업가정신 연계 전공’을 했다. 창업은 빨랐다. 한 학기 동안 자체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도전학기제' 프로그램이 기폭제가 됐다.
2019년 창업 이후 피보팅(사업 전환)만 10번을 거치기도 했다. 현재의 데이터 수집·거래 플랫폼이 사업성을 인정받아 한국투자액셀러레이터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설문 형태로 데이터를 모으는 '왈라', 데이터를 거래하는 '캐다'가 주요 서비스다. 서울대, KT 등과 협력하고 있다.
같은 해 창업에 뛰어든 김희수 테일러타운 대표도 회사 설립 당시 연세대 의류환경학과 2학년이었다. 테일러타운이 운영하는 패션 커머스 서비스 ‘댄블’은 직장인 남성을 타깃으로 의류를 추천해 준다. 체형과 트렌드 데이터 분석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김 대표는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를 창업 아이템으로 승화했다. 항상 옷을 수선해서 입다 보니, 첫 아이템이 비대면 수선 플랫폼이었다. 그는 “박카스를 들고 전국을 돌며 플랫폼 입점 제안을 했다”고 소회했다. 하지만 타깃 시장이 좁다는 것을 깨닫고 피보팅을 결정했다. 100명 이상의 직장인을 인터뷰해 댄블을 만들었다. 최근 퓨처플레이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며 포문을 텄다. 그는 “올해 거래액 1000% 성장이 목표”라고 말했다.
든든한 기반, 1975·63년생 토끼띠
올해 만 48세와 60세인 토끼띠들은 여러 대기업의 전·현직 경영자 위치까지 올랐다. 정보기술(IT)업계에는 1963년생 홍은택 카카오 대표, 1975년생 정우진 NHN 대표 등이 있다. 이들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로서 다양한 스타트업과 협력하는 등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스타트업 창업자에서 투자자로 변신해 창업자들을 돕는 사례도 많다. 1963년생 토끼띠인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는 국내 최초로 액셀러레이터(AC·창업 육성기관)를 세웠다. 2010년부터 프라이머를 통해 스타트업 창업을 돕고, 극초기 투자를 하고 있다. 권 대표는 평소 SNS를 통해 후배 창업가에게 많은 당부를 남긴다. 새해 벽두엔 “큰 것, 유명한 것, 돈 버는 것은 의미 추구를 방해하고 길을 잃게 만든다”며 “사회에 깊은 ‘임팩트’를 남기는 것에 몰입해야 한다”고 썼다. 권 대표는 그동안 이니시스, 이니텍 등 5개 회사를 세웠다.
신세계그룹의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시그나이트파트너스의 임정민 투자총괄은 “올해 소비재 스타트업은 보수적 소비자들의 수요를 파악해 사업 모델을 수정해야 하고, 기업 간 거래(B2B) 분야 스타트업은 비용 절감과 함께 자동화 솔루션 수요를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극화·파편화와 내수 중심의 지역화 현상을 거스르기 보다, 순응하면서 서비스를 과감히 고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임 총괄은 소셜게임 개발사 로켓오즈 등을 설립했고, 소프트뱅크벤처스와 500스타트업 대표 파트너 등을 거쳤다. 1975년생인 그는 현재 투자를 통해 후배 창업가들과 교류하고 있다. 그 역시도 과거 창업했던 회사가 어려워져 직원 절반을 내보내고, 밑바닥에서 자신을 불살랐던 강열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는 “세상에 없던 것을 출시할 때 피곤과 함께 찾아오는 ‘카타르시스’는 창업가의 특권”이라며 “시장 상황이 어려워 모두가 떠날 때가 세상을 바꿀 기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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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한 가지 더
미국에서 페이팔·아마존 만든 토끼띠?
서양에서는 십이지 같은 것은 없다. 별자리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특히 한국의 토끼띠 연도에 출생해 스타트업 업계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적지 않다.
페이팔 공동창업자 출신인 맥스 레브친, 루크 노섹, 켄 하워리 등이 1975년생 동갑내기다. 레브친은 페이팔 매각 후 슬라이드닷컴을 창업해 매각했으며, 핀테크 업체 어펌을 설립해 상장에 성공했다. 하워리는 노섹과 함께 파운더스펀드를 만들어 벤처투자에 뛰어들었다. 노섹은 이후 스페이스X 투자로 이름을 알린 기가펀드를 세우기도 했다.
이전 세대로는 제프 베이조스가 있다. 1964년 1월생이다. 아마존을 만든 세계 네 번째 부자 제프 베이조스가 최근 주목하는 것은 우주다. 그는 우주 탐사기업 블루오리진을 직접 설립해 유인 우주여행과 로켓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달엔 미 항공우주국(NASA)의 달 착륙선 개발 프로젝트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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