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상강도지만 정정당당하게 힘과 폭력을 사용해서 재산을 빼앗는다. 자네 같은 비열한 은행가와는 다르지. 자네는 위험을 감수하지도 않고 책상 뒤에 숨어서 무고한 사람들을 등쳐 먹잖아. 너처럼 돈 빌려주고 이자나 받는 더러운 인간은 교수대에 매달려야 해.”
범죄자가 멀쩡한 은행가에게 훈계라니, 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죠. 하지만 1500년대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런 얘기가 꽤 설득력이 있었나 봅니다. 이 대화는 독일의 작가 울리히 폰 후텐이 쓴 <도적들>이라는 소설에 등장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기사(겸 노상강도)는 자본가들을 이런 식으로 맹비난합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당시 부자들에 대한 반감이 크던 농민들은 상당수가 이 책에 공감했다고 합니다.
지난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 중 하나로 불리는 독일 기업가 야코프 푸거(1459~1525)의 성공 스토리를 다뤘습니다. 이번 회에서는 푸거가 재산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쩌다 그의 행동이 종교개혁(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과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전쟁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이야기를 꼭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이 기사부터 먼저 보신 뒤에 읽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합니다.
부(富)를 쌓는 건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게 쌓은 부를 지키는 일입니다. 특히 큰 부자일수록 그렇습니다.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 큰 부를 쌓았지만 처절하게 몰락해 알거지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몰락의 이유도 다양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정치권을 비롯해 돈을 빼앗으려는 세력, 가족 간의 다툼,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쌓은 죗값 등등….
유럽 구리산업을 지배하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 푸거에게도 재산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푸거는 그때 기준으로 꽤 양심적인 기업가였습니다. ‘암살을 사주하지 않고 경영으로만 승부했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청부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긴가 싶으시겠지만, 당시 왕족·귀족들의 권력 투쟁이나 사업 다툼에서 암살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음식점 사장님이 경쟁 업소 리뷰에 ‘별점 테러’를 하는 정도의 느낌이었죠.
푸거는 양심적인 편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쁜 짓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푸거의 부하가 성직자 자리를 사고팔아 큰돈을 번 건 애교 수준이었습니다. 정말 큰 사고를 친 건 푸거의 주 거래 대상이었던 교황청의 고위 사제들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황을 뽑는 선거에서 당선되려면 막대한 뇌물을 뿌려야 했는데, 후보자들은 이 자금을 푸거에게 빌렸습니다. 교황으로 당선된 사람은 돈을 가장 많이 뿌린 사람이니 그만큼 빚도 많았겠죠. 이 돈을 갚기 위해 1506년부터 교황청이 찍어낸 게 그 유명한 면죄부(면벌부)입니다.
면죄부는 간단히 말해 ‘지옥불 면제 티켓’입니다. “이 표를 돈 주고 사면 당신과 당신의 일가친척을 지옥불에서 꺼내주겠다”는 게 교황청의 약속이었죠. 명목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거였지만, 수입의 절반은 푸거에게 빚을 갚는 데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면죄부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돈에 미친’ 교황청의 행태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일이 터집니다. 1517년 독일의 사제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면죄부를 공개 비판하고 나서면서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종교개혁이 촉발됩니다. 대중의 주공격 대상은 교황청, 부패한 성직자, 그리고 면죄부 판매의 원인을 제공한 푸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상도 15~16세기 들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총이 널리 보급되면서 기사의 전술적 가치가 떨어진 겁니다. 아무한테나 총만 들려주면 웬만한 기사 못지않게 잘 싸우니, 영주 입장에서는 비싼 돈 주고 기사들에게 월급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실업자 기사’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기사들은 노상강도로 돌변했습니다. 코딱지만 한 영지에서 나오는 소작료만 가지고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는커녕 말 사룟값도 대기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결코 자신들의 강도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귀족이니 평민보다 호화롭게 살 자격이 있어.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기꺼이 하지.” 그들의 평균적인 마인드가 이랬습니다.
푸거는 이런 노상강도들에게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강도 때문에 장사에 차질이 생겼고, 직원들도 물건을 옮기는 업무를 기피했습니다. 푸거 자신도 강도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도에게 목숨을 잃은 친척과 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사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자네는 힘으로 돈을 빼앗지 않고 부정한 수법으로 빼앗지. 내가 하는 건 정직한 도적질이야.”
이들을 후방에서 지원한 건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독일의 문필가이자 선동가 후텐이었습니다. 후텐도 기사 집안 출신이었습니다만, 싸움에 소질이 없었던지 글을 열심히 배워 관료가 됐습니다. 사실 그의 수입은 넉넉한 편이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독특한 정의감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자본가는 나쁘다. 특히 푸거가 가장 나쁘다. 자본가를 죽이고 재산을 나눠야 한다.’
그는 수많은 선동 글을 쏟아냈습니다. “푸거가 뇌물을 주며 글을 쓰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돈으로 내 입을 막을 순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현대 역사가들의 생각입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후텐에게 환호했습니다. 면죄부 때문에 푸거의 이미지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진 자를 끌어내리고 그 재산을 나누자는 제안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후텐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만 갔습니다.
대중들의 환호에 한껏 취한 후텐은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비판만으로는 안 되겠다. 자본가들을 죽이고 다시 기사가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자.” 그리고 1만명에 달하는 기사들을 선동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실제 전쟁은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군은 푸거에게 지원받은 돈으로 대포를 마구 쏴댔습니다. 수많은 기사가 대포를 맞고 죽었고 기사라는 계급도 전쟁 이후 완전히 무너집니다. 도망가던 후텐은 지병인 매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반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하필 이날은 곡식을 추수하는 날이었습니다. 한창 바빴던 농민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자 연장을 던져버리고 파업에 돌입합니다.
황당하긴 하지만 사실 이 사건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농민들의 파업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 소문이 퍼지면서 귀족과 자본가에 대한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던 독일 방방곡곡의 농민들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물을 넘치게 하는 것은 마지막 한방울’이라는 말처럼 끓고 있던 심정이 사소한 사건으로 폭발한거죠. “농노제를 폐지하라. 세금을 깎아달라. 그리고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부자들의 돈을 나눠달라.”
사적 소유를 금지하자는 건 당시 유럽에서 급격히 발전하던 자본주의의 싹을 완전히 밟아 버리고, 체제를 뒤엎자는 얘기였습니다. 농민봉기 지도자들은 푸거를 ‘악의 축’으로 선언하고 푸거 세력의 본진(아우크스부르크)을 직접 공격했습니다. 푸거가 살아남으려면 체제와 사회 질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전력으로 진압을 지원합니다.
수많은 농민 봉기 지도자 중 푸거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토마스 뮌처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습니다. “사적 재산을 철폐하고 모든 걸 함께 나눠 가져야 합니다. 신께서 부자를 죽이러 오실 겁니다.” 많은 대중이 그에게 열광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훗날 그에게 “그야말로 대(大) 공산주의자였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뮌처가 대 공산주의자라면, 푸거는 대 자본주의자였죠. 그래서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있던 시절 양측은 각 인물을 자신들의 영웅으로 내세웠습니다. 동독은 5마르크짜리 지폐에 뮌처의 얼굴을 새겼고요. 서독은 푸거 우표를 발행했습니다.
농민 반란군 측에는 열정과 뮌처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전략은 지리멸렬했고 군기는 형편없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농민들은 무기를 내팽개치고 귀족의 식량 창고와 와인 창고로 달려가 잔뜩 먹고 마신 뒤 만족해서 뻗어버렸습니다. 전세가 불리하면 사방팔방으로 도망쳐 버렸고요. 결국 농민 반란은 10만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진압됩니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업은 조카가 물려받았습니다. 조카는 푸거의 사업을 그럭저럭 잘 지키고 키워나갔지만, ‘1등 부자’라는 왕관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무거웠습니다. 결국 몇 대 지나지 않아 푸거 가문 사람들은 경영권을 쪼개 이리저리 팔아넘긴 뒤 그 수익을 나눠서 ‘일 안 하는 그냥 부자’로 편하게 살기를 택합니다. 그 재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손들이 별다른 사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푸거 가문 사람 상당수가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의 유산 중 가장 유명한 건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빈민 주택이자 관광 명소인 ‘푸거라이’ 입니다. 1521년 푸거는 총 106세대 규모, 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빈민 주택단지를 건설했는데요. 일자리를 가진 카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1년에 1플로린(현재 가치로 85유로, 11만4000원 가량)의 월세를 내고 살 수 있었습니다. 다만 거지는 입주가 불가능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 그들은 동정과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거지는 도와줄 가치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많은 이들이 푸거라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증조할아버지도 이곳에 살았고요. 지금도 이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령의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달에 만 원도 안 되는 월세도 여전합니다. 다만 달라진 점은, 이제 이곳 앞으로 관광버스들이 다닌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던 푸거와 그의 인생에 얽힌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을 알아봤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의 행적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 한쪽으로만 평가하는 것보다는, 푸거 관련 책 중 최고로 평가받는 <자본가의 탄생>을 지은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설명을 참고해 보는 것도 좋겠지요.
“푸거는 탐욕스럽고 노동자를 착취했으며 가족을 괴롭히고 전쟁에 자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기업가들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비 수요를 충족하며 문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푸거를 움직인 정신은, 사람들이 의약품과 백신을 개발하고 고층 건물을 지으며 컴퓨터를 발명하도록 움직인 정신과 같다. 그를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인류를 진보시키는 동력을 무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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