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억울해서였을 수도 있고, 수감생활에 대한 두려움이나 수치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날 이후 판사로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옳은 판단이었다 해도 구속하지 않았다면 피고인이 사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자책감에 상당 시간 힘들어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구속하지 않았는데 이후 그가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했다면 아마 그 결정 또한 두고두고 후회를 불러왔을 것이다.
최근 라임펀드 사태의 핵심 인물이 재판 중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영장전담 판사가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바람에 도주가 가능했다는 취지의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중범죄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재판 중 도주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만 영장판사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결과론적이다. 여기에는 사건 발생 후에 그런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법했다고 결론짓는 ‘사후적 고찰의 오류(hindsight bias)’가 개입했다고 본다. 석방된 피의자가 도주하지 않았다면 과연 구속영장을 기각한 결정이 문제가 됐겠는가.
영장청구서를 보면 검사는 한결같이 피의자에게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피의자들은 성실히 수사에 임했고 향후 재판에도 성실히 출석할 것이며 증거인멸의 우려는 없다고 주장한다. 영장재판을 하는 판사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재판은 확정된 뒤에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고,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다. 형사소송법은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 한해 필요한 최소한도의 범위 안에서 구속 등 강제처분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판사가 신이 아닌 이상 영장이 청구된 피의자가 석방될 경우 실제 도주할 것인지, 증거를 인멸할 것인지,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피의자가 영장실질심사 단계에서 구속되지 않고 석방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판사 업무의 편의를 위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영장을 발부할 때는 미리 적혀 있는 구속 사유에 체크만 하면 되지만 기각할 때는 왜 기각하는지 판사가 직접 이유를 기재해야 한다. 사건의 실체와 본질을 모르면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는 있어도 기각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판결에 대한 책임은 판사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수많은 대한민국 영장판사는 피의자에게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사건 기록을 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사기관과 독립된 헌법기관인 판사가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에 대해 지난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수사기관의 의심이 곧바로 구속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야 하겠지만, 의심의 대상은 내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민철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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