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장을 죽 둘러보니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축이 유럽과 미국에서 아시아로 옮겨가는 게 눈에 확 들어옵니다.”
11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컨벤션센터. 이날 개막한 동남아시아 최대 아트페어 ‘아트SG’에서 만난 한 미국인 컬렉터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시아의 미술 챔피언인 홍콩이 ‘중국화(化)’하면서 힘을 잃자 그 빈틈을 한국 일본 싱가포르가 치고 들어가는 모양새”라며 “올해 처음 개최했는데도 참여 갤러리와 출품작 등을 볼 때 유럽의 웬만한 아트페어에 뒤지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미술시장의 꽃’으로 불리는 아트페어의 주 무대가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다. 아트바젤(스위스), 프리즈(영국), FIAC(프랑스) 등 세계 3대 아트페어의 ‘종주국’인 유럽에서만 움직이던 글로벌 갤러리와 컬렉터가 하나둘 아시아로 향하고 있어서다. 서울 도쿄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주요 도시가 앞다퉈 대형 아트페어를 열면서 이런 현상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올해는 아시아에서 ‘아트페어 대전’이 벌어지는 첫해다. 포문은 싱가포르가 열었다. 이날 아트SG에서 만난 세계 각국의 컬렉터들은 “싱가포르가 제대로 이를 갈았다”고 입을 모았다. 질과 양 모든 면에서 그랬다.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워너, 화이트큐브 등 정상급 갤러리를 포함해 30여 개국의 164개 갤러리가 출전했다. 지난해 9월 열린 프리즈 서울(110여 개)보다 많다. 장소도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샌즈 컨벤션센터 1층과 지하 1층을 통째로 빌렸다.
프리즈 서울은 피카소, 에곤 실레 등 옛 거장의 작품이 중심이었다면, 아트SG는 ‘요즘 뜨는’ 동시대 작가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중국과 동남아 부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화이트큐브가 출품한 중국 화가 류웨이의 회화와 타데우스로팍이 내놓은 중국 작가 얀페이밍의 대형 호랑이 그림 등 ‘중국 취향’ 그림이 눈에 띄었다. 리만머핀이 동남아 컬렉터들을 겨냥해 선보인 말레이시아인 맨디 엘사예, 베트남계 미국인 타미 뉴엔 등 ‘로컬 작가’들의 작품 앞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가나아트, 조현화랑 등 국내 주요 갤러리도 아트SG에 부스를 차렸다.
신생 아트페어인 아트SG에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총출동한 건 아시아 ‘큰손’들이 싱가포르에 몰리고 있어서다. 아시아의 미술 허브였던 홍콩은 정세 불안, 코로나19 과잉 방역 등으로 힘이 빠지는 모양새다. 2020년 코로나19가 터진 뒤 중국·홍콩 거부들이 싱가포르에 자산을 옮기면서 싱가포르 내 패밀리 오피스(고액 자산가를 위한 자산 관리 서비스)는 2018년 27개에서 2021년 453개로 급증했다.
아트SG 공동 창립자인 매그너스 랜프류는 기자간담회에서 “아트SG는 동남아를 넘어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 미술시장을 잡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오는 7월 처음으로 ‘도쿄 겐다이’를 개최한다. 큰손 컬렉터와 탄탄한 작가층을 앞세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대표 아트페어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은 미술시장 활성화를 위해 미술품 거래 면세 혜택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주변국의 도전에 가만히 있을 홍콩이 아니다. ‘슈퍼 리치’들이 홍콩을 빠져나가고 있지만 미술품 거래세 면제 등 매력 포인트는 여전하다. 코로나19 이후 매출이 쪼그라들었던 크리스티 경매도 지난해 홍콩에서 ‘매출 1조원대’를 회복했다. 크리스티는 내년 아시아태평양 본사를 홍콩에서 확장 이전할 계획이다.
국내 한 갤러리 관계자는 “아시아 미술 수도를 둘러싼 4개국 간 경쟁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라며 “사치품에 대한 과세 완화 등 제도적인 부분을 보완하면 한국도 충분히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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