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의 반대가 거세지자 대구 북구청은 2021년 2월 공사 중단을 명령했다. 무슬림들은 이에 맞서 공사중지명령 철회를 위한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9월 북구청의 처분이 위법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그래도 갈등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민단체 등 외부인들도 건축 찬성과 반대로 나뉘었다. 무슬림 혐오다, 종교 탄압이다라고 맞서며 상호 불신과 감정 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공사 현장 앞에 무슬림이 금기시하는 삶은 돼지머리, 돼지 바비큐까지 등장해 충격을 안겼다.
주민들의 행복추구권도, 무슬림이 요구하는 종교의 자유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그러니 어느 일방의 승리로 이 갈등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나 시민단체가 중재자로 나서 조금씩 양보하는 타협안을 만들 수는 없을까. 사원을 짓되 아잔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최소화하고, 무슬림의 동선도 최소화해 주민의 일상 침해 가능성을 줄이면 어떨까. 점차 서로 친해지면서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다. 마음을 열고 들어 보면 아잔 소리가 평화롭기 그지없다.
현실적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슬람은 중동, 아프리카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16억 명가량의 신자가 있는 거대 종교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의 막대한 투자로 기대되는 제2 중동 붐은 글로벌 복합위기를 타개할 중요한 활로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 속에서 이슬람권은 경제, 외교 등 다방면에서 교류를 확대하고 지지를 넓혀야 하는 지역이다. 무슬림과 친구가 되지 않고서는 글로벌을 지향하기 어렵다.
세상은 단 하나의 가치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유가 중요하지만 공익을 위해 제한해야 할 때도 있다. 인권의 측면에선 백번 옳다고 해도 국제 난민을 무한정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의 한계도 있다. 이런 면을 무시하고 자기가 믿는 가치와 명분만 고집하는 건 배타적 근본주의나 다름없다. 일제 시기 강제징용 배상 문제도 마찬가지다. 징용 피해자에 대한 피고 기업의 배상과 사과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사안에 걸려 경색된 한·일 관계를 무한정 방치할 수도 없다. 북핵 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과 함께 경제·안보의 핵심 파트너다. 정부가 제3자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내세워 기업들의 기부금으로 배상금을 변제하고 일본 측의 사죄와 기여를 골자로 한 호응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 궁여지책이다. 그런데도 야당이 ‘친일 외교’ ‘저자세 굴종 외교’라고 비난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다. 양보와 타협 없이 가치 갈등의 늪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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