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名畵)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엔 ‘아주 잘 그린 그림, 또는 유명한 그림’이라고 적혀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박민준 작가(52)의 그림은 명화다. 그의 그림을 본 대다수 사람이 ‘아주 잘 그린 그림’이라는 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유럽의 고풍스러운 미술관에 걸려 있을 법한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회화를 연상시킨다. 우아한 색감과 완성도 높은 구성, 극도로 정밀한 묘사 때문이다. 작품 주제도 독특하다. 자신이 만들어낸 판타지 세계 속 서커스단을 그린다. 그 상상 속 이야기를 소설책 두 권으로 정리해 출판하기도 했다. 잘 그리고 독창적인 데다 배경 설명이 탄탄하니, 요즘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지금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박 작가의 열 번째 개인전 ‘X’엔 연일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상한 점도 있다. 요즘 웬만한 현대미술관과 비엔날레 전시장에 나온 동시대 미술 작품은 대부분 설치미술 아니면 미디어아트다. 회화는 대부분이 추상화다. 주제도 한국, 여성, 흑인 등 작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배경으로 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 속 이야기를 서양의 고전 회화풍으로 그리는 박 작가는 시류를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다. 지난 12일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그에게 물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리나요.”
홍익대 미대를 다니던 그는 극사실주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림 그리는 기술엔 자신이 있었지만,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그림을 그린다는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명작 ‘의심하는 도마’(1602)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명 한 줄 없이도 그림이 이렇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구나’ 싶었던 겁니다.”
그 길로 르네상스 시대 회화를 파고들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인간이 손으로 그린 그림 중에서는 르네상스 때 유화가 가장 아름답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기법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 홍대 대학원을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예술대에서 유화 기법과 재료를 공부했고, 틈날 때마다 유럽을 여행하며 그림과 건축물을 둘러봤다. 10여 년의 공부 끝에 마침내 고전 회화의 매력과 그만의 독창성을 조화시킨 지금의 스타일이 완성됐다.
“작가라면 사회 문제나 한국인의 정체성 같은 현실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사랑처럼 좀 더 본질적인 주제를 다루고 싶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신화 속 이야기를 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예술가가 오랜 세월 다룬 주제라 새롭게 표현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더욱 독창적인 표현법을 찾았어요. 2010년대 중반부터 저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그림과 소설 등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자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찰흙으로 만든 조형 작품들과 함께 3차원(3D) 프린터로 제작한 작품도 여럿 나왔다. 지하 1층 전시장을 16~18세기 이탈리아의 가면 즉흥극 ‘코메디아델라르테’ 극장처럼 꾸며놓은 공간은 설치미술이라고 해도 될 만큼 완성도가 높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소설이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면서 동화 수준의 삽화를 그려 넣는 작가는 더러 있다. <어린 왕자>의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박 작가처럼 전업 화가면서 소설도 쓰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제 머릿속에만 있는 인물들과 내용을 그리고 나니 ‘무슨 얘기냐’고 되묻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어서 아예 책까지 내게 됐어요. 서커스단 소속 형제의 성장기인 <라포르 서커스>, 가상의 600년 전 화가 이야기를 다룬 <두 개의 깃발>입니다. 다만 책은 그림 속 등장인물들과 세계관을 설명하는 수단일 뿐, 그림이 표현한 장면을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책을 안 읽어도 전시를 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글 쓰는 건 아마추어 수준이기도 하고요. 하하하.”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탄성을 지르는 사람이 많지만 정작 박 작가는 “나만큼 잘 그리는 작가는 많다”고 했다. “세계적으로도 한국 작가들의 평균적인 그림 실력은 뛰어난 수준이에요. 스타일과 독창성의 차이는 있어도 웬만해서는 그림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죠. 그래서 작품에 얼마나 시간을 쏟는지가 중요해집니다. 대형 작품인 ‘신념의 탑’과 ‘영원의 탑’은 2020년부터 구상하고 드로잉을 시작해 완성하는 데 3년 가까이 걸린 그림입니다. 이 드로잉을 유화로 옮기는 데만도 하루 12시간씩 반년이 걸렸죠.”
그에게 앞으로 어떤 작품을 그릴 거냐고 묻자 “나도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가 그림을 그렸던 건 다른 재능보다 그림 그리는 재능이 좀 더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명화를 그린 거장들이 영원히 미술사에 남듯이, 그림으로 제가 이 세상에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다 보니 ‘그림 말고 다른 걸 해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치작업을 비롯해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다면 뭐든지 마음 가는 걸 해보려 합니다.” 전시는 다음달 5일까지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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