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이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24일까지 한 달간 화곡동 부동산과 빌라를 취재한 결과 상당수 부동산이 ‘LH 전세 가능’이라는 문구와 함께 빌라왕들의 매물을 중개하고 있었다. 화곡동의 한 부동산이 대표적이다. 중개인 김모씨는 이곳을 찾은 기자에게 “지하철 5호선 까치산역이 코앞”이라며 한 풀옵션 빌라(보증금 1억원, 월세 25만원)를 소개해줬다. 전세 사기가 걱정된다고 하자 “세입자가 살고 있어 주변 시세도 확인할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LH 전세임대를 적극 권했다. 그는 “이 제도를 이용하면 보증금 대부분이 대출로 나온다”며 “LH 대리인이 권리분석을 해주고 돈도 직접 임대인에게 보내 돈을 떼일 일도 없다”고 설득했다.
언뜻 솔깃한 제안처럼 들리지만 전문가들은 “악성 매물을 떠안는 수순”이라고 경고했다. 수소문한 결과 해당 물건은 화곡동에 오피스텔과 빌라 200채 이상을 갖고 있는 A씨 소유였다. 인근 B부동산 관계자는 “A씨는 인근에서 유명한 화곡동 ‘오피스텔왕’”이라며 “A씨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례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LH 전세임대를 권유하는 매물을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세입자는 주택보증공사(HUG)를 통해 전세 보증보험에 가입하고 문제가 생기면 HUG에 보증금 반환 청구를 한다. 다만 임대인에게 HUG 채무가 있으면 세입자의 보증보험 가입이 거부될 수 있다. 한문도 연세대 금융부동산학과 교수는 “HUG 채무가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정부 제도를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부동산 중개사무소는 요즘 두 부류로 나뉜다. 임대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임대인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해당 매물은 절대 중개하지 않는 부동산. 다른 한 편은 이른바 ‘빌라왕’에게 높은 수수료를 받고 악성 매물을 다른 세입자에게 떠넘기는 부동산이다.
화곡동 문제의 부동산은 후자에 속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세 가능’이란 문구와 함께 블랙리스트에 오른 소유주의 매물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주변 부동산들이 거래를 꺼리는 화곡동 ‘오피스텔왕’ A씨의 매물도 네 건을 가지고 있고, 이 중 하나를 기자에게 소개해줬다. 인근 B부동산 중개인은 “A씨 매물 중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가 다수 나왔다”며 “수수료에 혹해 문제 있는 물건을 중개하고 있는 부동산이 적지 않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세입자 만기가 본격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지난해부터 발생했다. 부동산 침체로 오피스텔·빌라 가격이 예상만큼 오르지 않으면서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종합부동산세와 재산세 등으로 수억 원을 납부해야 하는 상황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 세입자는 이달 초 계약 기간이 만료됐지만 이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집주인과 연락이 잘 안되고 있다”며 “3월까지 연락이 안될 경우 주택임차권 등기를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택임차권 등기란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할 때 세입자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등에 전세보증보험을 청구하는 절차 중 하나다.
집주인과 연락이 안돼 집수리를 자비로 하는 경우도 많다. 세입자 최모씨는 “입주 후 자세히 보니 변기가 망가져 있고 세탁기 호스 역시 없었다”며 “A씨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50만원을 들여 자비로 수리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LH 전세 임대 제도는 세입자가 전세 임대를 신청하면 LH의 대리인(법무사)이 권리 분석 등을 한 뒤 집주인과 직접 임대차 계약을 맺는다. 보증금이 세입자의 손을 거치지 않는 건 맞지만 세입자가 전세금을 떼일 경우 최소 수개 월에 달하는 반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종배 국민의힘 의원은 “LH 전세 제도는 악성 임대인을 걸러내는 시스템이 부실하다”며 “기준을 강화해 악성 임대인이 LH 자금을 폭탄 돌리기에 쓸 수 없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세입자들과의 연락은 대리인 등을 통해서 하고 있다”며 “보증금 반환에도 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장강호 기자 callm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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