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단색화가 뭔지는 아세요?”
최근 종영한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재벌가 둘째 며느리가 앙숙인 첫째 며느리에게 ‘교양 없다’며 조롱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이를 본 미술계 관계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류 지적.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2000년대 초반인데, 단색화라는 단어는 2012년 이후에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도 단색화가 뭔지 모른다”는 뜻밖의 고백이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의 단색화’ 전시를 연 뒤 너도나도 이 단어를 따라 썼을 뿐, 단색화의 정의조차 미술계에서 명확하게 규정한 적이 없어서다. 대략 ‘한 색조로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작업 과정이 반복적인 그림’ 정도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게 전부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단색화가 뭔지 궁금하다’고 작가한테 말하고 싶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통상 이런 일은 학계와 평론계의 몫이다.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왜 이 그림을 사야 하는지’에 대한 미학적인 이유가 붙지 않으면 세계적인 미술관에 걸 수 없다. 반대로 언뜻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라도 그럴듯한 해설이 붙으면 ‘러브콜’이 쏟아진다. 하지만 우리 학계와 평론계는 그동안 단색화를 외면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워낙 많다 보니 평론하기 부담스럽다는 게 이유였다. 한 화랑 관계자는 “최근 해외에서 단색화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많은 전문가가 이론적 토대가 부족하다는 걸 그 이유로 꼽는다”고 말했다.
학고재가 이 평론가와 손잡고 단색화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내놓은 단색화의 정의는 ‘화려한 형식을 배제하고, 작가 내면의 정신을 응축하고 절제해 화폭에 표현한 것’이다. 이 평론가는 “전시 제목인 의금상경은 2600여 년 전 중국에서 결혼식을 올리러 가는 귀족 여성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비단옷 위에 삼옷을 걸쳐 입었다는 고사에서 따왔다”며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아름다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아시아의 멋을 계승한 게 단색화”라고 설명했다.
단색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김현식(58)은 캔버스 대신 에폭시 수지에 그린다. 마찬가지로 작업 과정은 수행에 가깝다. 투명한 에폭시 수지를 칼로 그어 물감을 바르고, 다시 에폭시 수지를 부어서 굳히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작품에 층이 만들어지면서 깊이감이 생긴다. 우정우 학고재 실장은 “마크 로스코가 작품의 크기로 관람객을 압도해서 감동을 줬다면 김현식은 끝을 알기 어려운 깊이로 감동을 준다”고 설명했다.
중국 작가 왕쉬예(60)는 이우환의 추천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의 작품에는 한·중·일의 미술 특성이 한데 녹아 있다. 학고재 관계자는 “이번 전시에 나온 ‘원강석굴 제20굴의 시공나체·즉(82)’이 대표적인 작품”이라며 “중국 문화재인 원강석굴을 주제로, 일본 작가들이 즐겨 쓰는 아지랑이 같은 모양을 한국의 단색화를 작업할 때처럼 반복적으로 그렸다”고 했다. 전시는 다음달 25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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