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항공편으로 신선한 식재료를 공수해 옵니다. 재료비 단가가 워낙 높으니 적자가 날 수 밖에 없어요. 기업이 고품질을 위해 손해를 감내하는 매장일수록 고객들은 혜택을 보는 셈이지요."
한 중견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일부 외식 매장에서 손실을 보고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기업들이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최고의 셰프와 고급 식재료, 실험적 레시피 등을 고집하는 고급 레스토랑이 전국 곳곳에 포진해 있다.
브랜드 마케팅을 위한 '플래그십 매장', 시장 트렌드 변화와 고객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안테나숍', 신메뉴를 만들기 위한 연구개발(R&D)용 매장 등은 대부분 수익성보다는 품질과 서비스가 우선순위다. 미식 전문가들이 이런 매장들을 찾아다니는 이유다.
일치는 유제품과 분유 등을 생산하는 남양유업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2017년 개점해 5년 넘게 운영해왔지만, 활발하게 홍보하지는 않았다. 이번 박 씨의 방문도 남양유업이 홍보한 것이 아니라 박 씨의 한 팬이 SNS에 이 사실을 공유해 해외까지 알려진 것으로 전해졌다.
박 씨가 다녀가기 전에 이 레스토랑은 강남 일대에선 '한국식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유명했다. 국내 제철 유기농 식재료를 활용해 대저토마토 부라타 샐러드, 거제 돌문어 전채요리, 공주 옥광밤 스프 등 한국식으로 해석한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다.
특히 일치의 대표 메뉴인 트러플 화덕통닭 우유 리조또의 경우 36시간 이상의 요리시간을 투입할 정도로 정성을 쏟는다는 게 일치의 설명이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일치는 질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매장"이라며 "수익성만 생각한다면 90% 이상 유기농을 고집하거나 한 접시의 요리를 만드는 데 수 십시간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매장에서 프랑스빵 '라미장'을 만들 땐 개량을 거치지 않은 원시 상태의 밀인 '고대밀'을 맷돌로 직접 갈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게랑드 소금을 넣고 반죽을 한 후 발효해 구워내는 식이다. SPC의 최대 브랜드인 '파리바게뜨' 뿐 아니라 상위 브랜드인 '파리크라상'에서도 결코 구현할 수 없는 레시피다.
패션5와 같은 건물에 위치한 나폴리식 이탈리아 레스토랑 '베라'도 SPC가 운영하는 매장이다. 대부분의 원재료를 나폴리에서 수입해 사용한다. 올리브오일과 홀토마토, 버팔로 모짜렐라 치즈 모두 나폴리산이다. 해산물파스타에는 항공기로 직접 이탈리아에서 배송받는 생면이 들어간다. 원재료 값이 일반 매장보다 두 배 이상 드는 이유다.
'베지밀'로 유명한 두유제조업체 정식품이 베이커리와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식품은 지난 2021년 서울 회현동에 베이커리 카페인 넬보스코 남촌빵집과 넬보스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냈다. 지난해 9월엔 같은 건물 꼭대기에 루프탑 라운지바를 오픈했다. 이 건물에 제빵 연구소와 원두 로스팅룸까지 만들었다.
1973년부터 50년간 두유에 매진해왔던 정식품이 외식업에 진출한 건 식물성 기반 식품을 선호하는 소비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접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매장에선 두유를 이용한 식빵을 굽고 비건 아이스크림과 비건 스무디 등을 만들고 있다.
오비맥주는 지난해 하반기 서울 이태원에 벨기에 전문 레스토랑인 '프리츠 아르투아'를 열었다. 맥주회사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벨기에 음식을 팔게 된 이유는 벨기에 1위 맥주인 '스텔라 아르투아'를 알리기 위해서다. 오비맥주는 스텔라 아르투아를 수입 판매하다 최근 광주공장에서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인 BBQ는 서울 송파구에 브런치, 베이커리, 화덕피자, 커피 등 무려 190여종의 메뉴를 도입한 복합 외식 플래그십 매장을 냈다.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한 장소에서 식사와 디저트, 차를 마시고 각종 문화까지 충족할 수 있는 실험적 매장이다.
국내 최대 식품업체인 CJ제일제당도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을 딴 한식 파인 다이닝인 '소설한남'과 '모수', 광동식 중식당 '쥬에' 등을 소유하고 있다. 이 매장들은 유명 셰프들과 메뉴를 개발하고 시장의 반응을 살피는 '안테나숍' 역할을 한다.
하지만 고물가와 인력난, 치열한 경쟁으로 기업들조차 고급 레스토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내 대표 증류주인 '화요'를 생산하는 광주요그룹이 운영했던 한식 파인다이닝 '가온'은 지난 1일부터 잠정 휴업에 들어간 상황이다. 2003년 문을 연 가온은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유일하게 7년 연속 3스타로 선정 받은 레스토랑이다. 가온은 장기간 자본잠식에 시달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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