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1일 삼성전자의 컨퍼런스콜이 열린다. 분기마다 진행되는 실적 설명회 행사다. 삼성전자 주요 사업부 임원들이 나와 사업 현황을 설명하고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질문에 답한다. 삼성전자 주주와 반도체, 스마트폰 등 업계 종사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요한 이벤트다.
다음 주 컨퍼런스콜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삼성전자가 감산(減産)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임원의 한마디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일본 키오시아 같은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의 운명이 좌우될 전망이다. 글로벌 반도체주 주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가 잘 안 팔리면서 기업 창고엔 재고가 쌓여갔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반도체 재고액은 26조3652억원, SK하이닉스는 14조6649억원어치다. 현재는 두 회사 합쳐 5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체 제조사뿐만 아니라 반도체 유통 업체와 중국 스마트폰 기업, 일본 TV 업체, 미국 PC 업체 같은 고객사에도 반도체 재고가 쌓였다. 고객사들은 반도체를 구매하지 않고 재고부터 활용하게 된다. 이른바 '재고 조정'이다.
재고가 쌓이면 반도체 제조사들의 현금흐름이 악화한다. 칩을 판 돈으로 투자해야 하는데, 돈이 안 들어오게 된다. 자연스럽게 실적감소로 이어진다. 반도체산업 특성상 조(兆) 단위 투자금은 계속 나간다. 갖고 있던 돈이 다 떨어지면 결국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게 된다.
SK하이닉스, 일본 키오시아, 미국 마이크론 같은 기업들이 이런 상황에 부닥쳤다. 이들 반도체기업은 지난해 10월부터 "2023년에 설비 투자를 30% 이상 감축하고 생산량을 줄일 것"이라며 '인위적인 감산'을 선언했다.
삼성전자의 첫 번째 노림수는 '경쟁사와의 격차 벌리기'였다. 메모리반도체 기업의 실력은 크게 △기술력 △수율(전체 생산품에서 정상품 비율) △투자 규모 등으로 결정된다. 수율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메모리반도체 경쟁사보다 5%포인트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설투자 규모도 매년 경쟁사보다 50% 이상 많았다.
기술력도 2~3년 전까지만 해도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얘기가 달라졌다. SK하이닉스가 차세대 메모리반도체로 불리는 'HBM' 등의 기술력에서 삼성과 동일하거나 앞선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낸드플래시 셀을 많이 쌓는 '적층 경쟁'에선 마이크론이 앞서가가 시작했다.
반도체 불황은 이들 경쟁사에 대형 악재가 됐다. 삼성전자에 비해 자금 동원력과 규모의 경제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경쟁사들은 실적이 급격하게 악화했다. 투자도 축소했다.
투자 규모, 수율 등에서 강점이 있는 삼성전자는 높은 수익성을 바탕으로 버티기에 들어갔다. 반도체 가격 추가 하락을 견디면서 경쟁사를 벼랑 끝으로 몰고, 계획된 투자는 지속하면서 다시 올 '반도체 호황'을 대비하는 것이다.
메모리반도체 호황이 예상보다 빨리 올 것이란 기대도 컸다. 인텔이 압도적인 성능을 가진 서버용 신형 중앙처리장치(CPU)를 출시하면, 기업들이 효율적인 서버 운용을 위해 서버 교체에 나서고, 이때 신형 CPU와 호환되는 서버용 DDR5 D램, SSD 등의 수요도 덩달아 살아날 것이로 전망했다. 메모리반도체 수요처가 PC, 스마트폰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화하고 있는 것, 인공지능(AI), 5G 등의 확산으로 반도체 수요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도 당시 삼성전자가 버티기를 결심하게 된 원인으로 꼽힌다. 호황기가 다시 오면 투자를 계획대로 진행하고 최신 제품 생산력을 확보한 삼성전자가 투자를 줄인 경쟁사들보다 더 큰 과실을 따 먹을 수 있게 된다.
자연적 감산만으로는 한계가 컸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에 메모리반도체에서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내부에선 칩 가격 추가 하락, 고객사 재고 조정 등이 진행되면 올해 상반기 메모리반도체 사업에서 수조원대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분기별 1조~1조5000억원대 적자를 예상하는 증권사보다 더 비관적인 전망이다.
'만약 반도체 하락기가 예상(올 하반기부터 반등)과 달리 연말까지 장기화한다면'이란 가정도 삼성전자 경영진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스마트폰, TV, 가전 등 삼성전자의 주력사업 모두 경기침체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버팀목 역할을 하는 반도체에서 대규모 적자가 지속된다면,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도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는 경영진에 엄청난 부담이다. 삼성전자는 2008년 4분기 이후 단 한 번도 분기 기준 영업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상황이 급변하면서 삼성전자 경영진은 '인위적 감산'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만약 세계 1위 D램, 낸드플래시 업체 삼성전자가 인위적 감산을 통해 칩 공급량을 줄이면, 시장의 '공급 과잉' 압박이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면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멈추고 반등을 시도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동안 재고를 일정 부분 해소한 스마트폰 제조사, 서버업체 등은 다시 칩 구매에 나서고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의 실적은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버티기'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 즉 경쟁사를 벼랑에 몰아넣어 격차를 더 벌리고, 돌아올 호황기의 과실을 독식하는 건 어려워질 수 있다.
31일 컨퍼런스콜에서 분명 누군가는 삼성전자에 '감산'에 대해 질문할 것이고, 삼성전자 경영진은 준비된 답을 할 것이다. 이 답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될 것이다. 이 회장은 어떤 전략적 판단을 내릴까. 삼성전자는 물론 향후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운명을 좌우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