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났다. 대학에 다닐 때다. 집에 온 나를 본 어머니는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아버지가 한양대병원에 입원하셨대. 비서가 사람을 시켜 은밀히 알려줬다. 난 발이 안 떨어져 못 가겠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눈물만 흘렸다. 곱돌아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아들을 어머니는 오래 지켜봤다.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으나 아버지 이름으로 입원한 환자는 없었다. 다행히 회사의 낯익은 직원 눈에 띄어 건장한 청년 몇이 문을 지키는 특실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지 않은 아버지를 만났다. 멀리 한강과 관악산을 붉게 물들인 저녁노을이 지고 야경으로 바뀔 때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아버지는 선 채로 말씀하셨다. 때로 흥분해 소리치기도 했지만, 그날 들은 몇 가지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고 두고두고 새길 말씀을 많이 했다.
창동 공장에서 플라스틱 용기를 생산하는 을지로 본사는 귀대인사차 딱 한 번 들렀을 때 ‘아버지 회사로구나’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만큼 규율이 엄격했다. 안내받아 지나며 만난 직원들은 목인사를 했고 사무실은 멀리서 봐도 정갈했다. 창업이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유독 어렵게 일군 아버지 회사는 1차 예금 부족으로 쉽게 부도가 난 데 이어 며칠 뒤 최종부도 처리됐다. “박 전무 그 친구 내가 그렇게 잘 봐줬는데 배신했다. 친동생보다 더 믿고 모든 걸 맡겼는데”라고 말문을 연 아버지는 “회사 자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라며 부도에 이른 경위를 설명했다.
아버지는 “소인이 허물을 범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허물을 덮으려 꾸민다. 바로 들통 날 거짓을 스스럼없이 하는 자들을 많이 봐온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다. 사람 욕심 강한 내가 내 눈을 스스로 가린 때문이다”라고 개탄했다. 그날도 인용한 고사성어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다.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 나온다. “군자는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어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다. 충과 신을 주장으로 삼으며,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아버지는 “잘못이 있는데 고치기를 주저하면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할 위험이 있고 잘못은 또 다른 잘못을 낳게 되므로 잘못을 고치는 데 꺼리지 말고 바로 고치도록 최선을 다하라”라는 뜻이라고 길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몇 번 눈에 거슬렸지만, 사정(私情)에 끌려 눈감아줬다”면서 “회사 사규가 엄연한 데 내가 지키질 못했다. 내가 책임지고 수습하겠다”고 했다. 문을 나설 때 아버지는 “사람은 언제고 변한다. 이미 쓴 사람은 믿어야 하지만 끝까지 믿지는 말라”고 다짐을 두셨다.
골목에서 서성이며 집을 기웃거리는 낯선 이들이 사라진 건 사흘 뒤였다. 다음 날 아버지는 자가용으로 퇴근하던 그 골목을 걸어서 귀가했다. 아버지는 “이제 우리 회사는 없다. 그렇지만 살 집은 있다”며 씁쓸하게 웃으셨다. 그 뒤 몇 번 회사 경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아버지는 적임자가 아니라며 고사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내가 알아들었다는 데도 굳이 과즉물탄개를 되새기며 저 말을 되풀이했다.
훗날 직장에 다니며 내가 직접 겪었다. 결코, 지키기 쉽지 않은 말씀이지만 손주들에게도 물려줄 고사성어임엔 틀림없다. 과즉물탄개는 인성으로 따지자면 도덕성, 규범성, 책임성을 담고 있다. 하루아침에 외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나를 스스로 이겨야 하는 힘겨운 노력이 오래 따라야 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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