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들의 압박이 엄청납니다. 빨리 돈(보조금) 받으러 미국 가라고요.”
독일 대표 스타트업 마블퓨전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모리츠 폰데어린덴은 최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이같이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이 지난해 8월 발효한 IRA가 유럽 기업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IRA는 미국의 전기자동차 및 신재생에너지 산업 생태계 조성에 최대 3690억달러(약 456조원)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법안이다. 세액공제와 보조금 등의 각종 혜택을 통해서다.
그러나 IRA가 미국 의회를 통과한 이후 마블퓨전의 주요 투자자들은 “얼른 유럽을 떠나라”고 재촉하고 있다. IRA가 핵융합 산업에 할당한 보조금 총 14억달러의 지원을 서둘러 받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미국 핵융합산업협회(FIA)는 “사상 최대 규모의 지원”이라며 세계 핵융합 유망주들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폰데어린덴 CEO는 “IRA는 글로벌 친환경 시장에서 미국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도록 완전히 판을 바꿔버린 게임체인저”라며 “유럽 정치인들은 산업 정책 측면에서 미국 정부를 배워야 한다”고 꼬집었다.
유럽이 유독 IRA에 날을 세우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후변화 대응의 선두주자를 자처해왔지만 하루아침에 타이틀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럽은 역내 자동차 기업들에 전기차 전환을 서두르게 하는 한편 해상풍력, 합성연료(e-fuel), 그린수소 등 클린테크 분야를 전폭적으로 육성해왔다.
유럽에선 IRA로 인해 관련 투자금이 미국으로 몰릴 것이란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마블퓨전과 같이 아예 짐을 싸들고 미국으로 이전하겠다는 기업들의 탈(脫)유럽 행렬이 잇따르고 있어 유럽 당국으로선 뼈 아플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친환경 기술 기업뿐만 아니라 철강, 화학 등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도 5년 안에 역내 투자를 대폭 줄여나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IRA로 인해 미국산 친환경에너지 가격이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면 이들 기업도 자연스레 미국 사업장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유럽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사용해야만 혜택을 주는 핵심원자재법(CRMA), 역내 클린테크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탄소산업중립법(Net-Zero Industry Act)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두고 “미국이 시작한 보조금 전쟁과 보호무역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유럽을 비롯해 한국, 일본 등 핵심 동맹국들이 IRA로 인한 ‘부수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필사적인 사이, 미국 주정부와 산업계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FT에 따르면 미국 미시간주, 조지아주, 오하이오주 등은 주정부 차원의 경제사절단을 유럽에 보내 “우리 주에 설비를 증설하라”며 홍보하고 있다. 일종의 ‘IRA 보조금 판촉’ 행사인 셈이다. 애리조나주 관계자는 “미국과 다른 나라들의 공장 유치 경쟁이 아닌, 미국 주정부 간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위스에 있는 태양광 모듈 제조사 마이어버거의 귄터 에르푸르트 CEO는 “미국 주정부, 시공사 등이 합심해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에 더없이 놀랐다”고 말했다. 마이어버거는 애리조나주에 추가 증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 청정전력협회에 따르면 IRA 통과 이후 미국에서 클린테크 공장을 신규로 짓거나 증설하겠다고 발표한 건수가 최소 20건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 중 절반 이상이 해외 기업들이다. 작년 10월 독일 자동차 제조사 BMW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17억달러 규모의 전기차 설비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한화큐셀도 조지아주에 태양광 공장을 증설하기로 했다. 투자 규모는 25억달러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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