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11일 새벽, 동트기 직전의 어둠을 타고 경복궁에서 가마 하나가 빠져나와 인근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했다. 가마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타고 있었다. 열강의 각축 속에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구한말, 한 나라의 국왕이 외국 공관에 몸을 의탁해 정사를 돌봐야 했던 치욕의 역사가 있었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127년 전 이맘때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에는 러시아를 한자로 음역해 ‘아라사(俄羅斯)’라고 쓰고 읽었다. 줄여서 ‘아국’이라고도 했다. 아라사에서 머리글자를 따고 뒤에 ‘나라 국(國)’ 자를 붙여 만들었다. 외래어 표기규범이 없던 시절 외국 인명·지명을 적던 방식이다. 이를 음역어라고 한다. 일본에선 러시아를 ‘露西亞’로 쓰고 [ロシア(로시아)]로 읽었다. 이 한자를 다시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게 ‘로서아’다. 한국은 개화기 때 중국과 일본의 표기를 다 들여와 아라사, 로서아를 혼용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좀 더 이른 시기에 ‘나선(羅禪)’이라고도 했다. 효종실록에 전하는 얘기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 임금이 말하길,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영고탑(청나라 때 만주지방의 지명)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조선 효종 때인 1654년 2월 2일 일이다. 국어사전에 ‘나선’은 따로 없고 ‘나선정벌’이란 역사용어로 올라 있다. 나선정벌은 효종 5년(1654)과 9년(1658)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청나라 요청으로 러시아를 친 싸움을 말한다.
음역어는 나선이나 로서아처럼 대개 발음이 비슷해 금세 관련성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아라사는 발음만 갖고는 러시아를 연상하기 힘들다. 중국에선 러시아를 왜 ‘俄羅斯[어뤄쓰]’로 불렀을까? 17세기 러시아와 중국이 서로 교역하려고 접촉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리말에서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아라사, 아국, 로서아 외에 나선, 소련, CIS, 독립국가연합 등…. 이들에서는 지난 시절 외래어를 옮기던 우리말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소련(蘇聯)은 옛 제정러시아가 무너진 뒤 러시아를 중심으로 15개 공화국으로 이뤄진 연방국이었다. 정식명칭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다. 이를 줄인 게 ‘소비에트 연방’이고 한 번 더 줄여 ‘소련’이라 했다.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Soviet)에서 ‘소(蘇)’를 취하고 연방(聯邦)의 머리글자와 합쳐 만든 말이다. 약어(그중에서도 두문자어) 수법을 활용한 음역어인 셈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뒤 나온 게 CIS다. 연방체제를 구성하고 있던 공화국들의 정치공동체를 이렇게 불렀다.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머리글자로 만든 두문자 약어다. 이를 우리말로 ‘독립국가연합’이라고 했다. 이는 일종의 번역어에 해당한다.
나선을 비롯해 아라사든 로서아든 소련이든 CIS든 다 지난 시절 우리말의 한 모습이다. 지금은 발음 그대로 한글로 ‘러시아’라고 쓰고 읽으면 그만이다. 실제 발음을 옮겨 적는 데 탁월한, 한글의 우수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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