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구조적 위기(banking crisis)가 발생하면 특허출원이 줄어드는 등 기업의 혁신이 위축하는데 벤처기업에 무담보 투자를 하는 벤처캐피털(VC)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이러한 부정적 영향이 적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의 경우에도 외환위기 시 VC가 발달했다면 관련 피해가 더 적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이 10일 발표한 BOK 경제연구 '은행 위기와 VC가 기술혁신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은행 위기가 나타났을 때 VC와 같은 대안적 금융 수단이 충격을 완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 위기란 한 국가의 은행 부문이 많은 수의 디폴트(채무불이행)를 경험하고, 갑작스럽고 심각한 수준의 은행 계좌 인출이 발생하며 기업과 금융기관의 채무불이행이 급증하는 시기를 의미한다. 예컨대 한국의 경우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 은행 위기를 경험했다. 일본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1년 닷컴버블 붕괴 등 은행 위기를 겪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외부 금융에 의존적인 산업일수록 은행 위기 시에 혁신 활동이 위축됐다. 은행 위기 시 각 산업의 외부금융 의존도가 한 단위 증가할 때마다 특허 출원 수와 인용 수는 평균적으로 각각 35.9%, 11.5% 감소했다. 특허 독창성(다양한 분야를 인용할수록 높음)과 일반성(다양한 분야로부터 인용 받을수록 높음) 점수도 각각 17.6%, 26.6% 줄었다.
은행 위기의 부정적 영향은 벤처캐피털이 발달한 곳일수록 완화되는 것으로 나왔다. 한 국가의 벤처캐피털 지수가 평균보다 일정 수준 높을 경우 은행 위기의 특허 출원 수, 인용 수, 독창성, 일반성에 대한 부정적인 충격이 상쇄됐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벤처캐피털 지수는 세계경쟁력조사에서 매년 130여개국의 기업 대표를 대상으로 혁신 활동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가용성 정도를 조사해 산출하는 지수다.
예를 들어 1983년 은행 위기를 경험한 이스라엘과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을 비교했을 때 한국의 혁신 위축이 훨씬 크게 나타났다. 보고서는 "금융위기 시 벤처캐피탈의 자금조달이 은행의 자금조달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한국이 벤처캐피털 금융에 더 많이 의존했다면, 금융 위기로 인한 피해가 적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1980∼2012년 사이 데이터를 기준으로 했다. 이 때문에 한국의 혁신 수준과 벤처캐피털 발달 정도는 현재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특허 출원 수는 조사 대상 중 8위였지만, 2020년 기준으로는 세계 4위다. 벤처캐피털 지수 역시 연구 기간에는 평균 이하였으나, 2020년에는 투자액 기준 5위로 올라섰다. 연구를 진행한 성원 한은 미시제도연구실 부연구위원은 "한국 벤처캐피털 투자 수준은 OECD 국가 평균보다 높다"며 "대안적 역할을 하기 충분한지는 따로 분석해봐야 알겠지만, 과거보다 한국에서 벤처캐피털의 대안적 역할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VC는 장기적인 경제 성장뿐 아니라 금융 위기 이후 경제 회복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VC 시장의 발전을 장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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