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대부분의 진료기록은 구조화돼 의료기관 컴퓨터에 저장돼 있다. 검사기록, 영상기록, 진단명, 투약 정보, 치료 경과 등이 포함돼 있다. 최근에는 유전자 정보까지 포함돼 진료기록 데이터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맞춤형 건강 서비스의 개발이 더디다. 맞춤형 서비스 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양의 정상인 데이터와 환자의 의료 데이터가 필요하다. 여러 병원에 분산돼 있는 데이터를 모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의료기관은 전자적 형태로 의료기록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없고 제공한다고 해도 서식이 표준화돼 있지 않아 빅데이터를 구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개인정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유럽 국가들은 이런 문제를 정부의 노력을 통해 해결해왔다.
첫째 정보이동권을 정보주체의 권리로 명시하고 보장한다. 2018년 5월 발효된 유럽연합(EU)의 개인정보보호법(GDPR)이 근거법이다. 둘째 독일, 프랑스, 영국, 핀란드 등이 구축한 국가 의료 데이터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데이터 이동이 가능하다. 셋째 신약 연구와 같은 공익적 목적에 활용이 용이하도록 포괄적 동의 제도나 옵트아웃 제도, 심지어는 동의 면제를 법제화한 사례도 있다.
법체계가 다른 미국은 진료기록의 오너십을 가진 병원들이 환자 스스로 자신의 전자진료기록에 접속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공보험 운영자인 CMS의 최종규칙에 따라 2022년 10월부터는 병원들이 이를 막지 못하게 됐다. 이를 통해 환자들이 다운로드할 수 있는 진료기록 범위가 확대됐다. 정부의 노력으로 더 많은 정보가 이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라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일찍 의료기관 정보화를 이룬 데다 3분 진료 문화로 인해 해외 국가들은 상상할 수 없는 양의 데이터를 병원들이 보유하고 있다.
서울의 소위 빅5 대형병원들은 다른 나라로 치면 수십 개 병원의 데이터를 모은 것보다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대형병원 데이터에 국민건강보험공단 데이터를 결합시킬 수만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빅데이터보다 강력한 빅데이터를 만들 수 있다. 병원별로 따로 구축해도 데이터 양이 충분하니 병원마다 데이터를 모을 필요도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빅데이터를 연구자와 기업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다면, 추가적인 법개정 없이도 산업 활성화가 가능하다.
나아가 투자 유치, 특허 등록, 시제품 개발, 임상시험 등을 정부가 지원한다면 활성화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의료기관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의료기관의 투자와 기업 활동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 규제샌드박스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렇게 산·병·정 클러스터가 만들어진다면 그동안 금보다 귀한 줄 모르고 축적해온 병원 의료 데이터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클러스터가 만들어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자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옵트아웃 방식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EU 국가들의 사례를 참고하면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건강 데이터의 보호와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면 보호의 기반 위에서 활용이 논의돼야만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최소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우리나라가 개발한 맞춤형 건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데이터 경제 시대에 데이터 주권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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