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슬램덩크>가 ‘인생의 책’인 사람들이 있다. 판사 출신 드라마 작가 문유석(54)이 그렇다. 그는 2018년 펴낸 에세이 <쾌락독서>에서 슬램덩크를 처음 접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슬램덩크>를 읽은 것은 이 시기, 이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라고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정말 뭔가가 좋아서 미쳐버리겠다는 아이들의 환희가 가득했다. 눈부셨다. 거기엔 하기 싫어 죽겠는데 억지로 시늉만 내고 있는 자 따위는 없었다. 나는 묘한 슬픔 속에서 그걸 읽었다. 내가 있는 곳은 전혀 눈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 시절이었다. 그는 “부끄럽지만 그때까지 내가 대단히 천재인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교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도 서울대 법대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법전 내용은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사시 합격은 기약이 없었다.
공부하러 나간다고 아침 일찍 집을 나가서는 노량진이나 서울역으로 향했다. 큰 만화가게들이 있는 곳이었다. “온통 담배 냄새와 찌든 고린내, 손님들이 시켜 먹은 짜장면 냄새가 가득한 그곳들에서 나는 아침 일곱 시 반부터 밤 열두 시까지 만화를 읽거나, 엎드려 잤다.”
그곳에서 만난 슬램덩크는 그의 ‘인생 만화’가 됐다. 그가 대본을 쓴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2018년)에는 슬램덩크 오마주가 두 차례 등장한다. 정보왕 판사가 배곤대 부장판사에게 외치는 “부장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와 주인공 박차오름의 징계 회부가 철회됐다는 소식에 앙숙이던 정보왕과 천성훈이 자기도 모르게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바로 외면하는 장면이다.
마음에 가장 와닿은 슬램덩크 속 대사는 변덕규의 “난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 좋다”란다. 체격은 좋지만 팀 동료만큼 천재적인 재능이 없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한 말이다. 문 작가는 “나 자신을 위해 힘이 되는 말이어서 좋았다”고 했다. “암담한 고시생 시절은 벗어났지만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곤 한다. 그럴 때 떠올린다. 그래, 나는 에이스가 아니었어. 팀의 주역이 아니면 어때?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하고 있으면 그걸로 족한 거 아냐? 누가 비아냥거려도 웃을 수 있게 된다. 죄송함다. 제가 원래 에이스가 아니거든요.”
정신과 의사인 하지현 건국대 교수(56)도 <슬램덩크>를 인생의 책으로 꼽는다. 2020년 펴낸 <정신과 의사의 서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슬램덩크를 읽지 않았다면? 조금 더 학문적으로 성공하고 좋은 지위를 갖고, 경제적으로 성취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쫓기는 듯, 결핍된 채 지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20년 넘게 슬램덩크를 반복해 읽으며 ‘짧은 인생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살자’는 강백호 인생관과 ‘잘될 거야, 걱정 마’라는 낙관적인 태도가 몸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슬램덩크 덕분에 “남과 비교하면서 애 태우지 않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마음 흔들리지 말라고 오늘도 애장판 스물네 권은 내 책장 한구석에 순서대로 가지런히 꽂혀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괜히 억지로 잘하려고 힘주지 마. 무릎을 살짝 튕기고 왼손은 거들 뿐이야’라면서.”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로 유명한 소설가 정이현(51)도 슬램덩크 팬을 자처한다. “약간의 과장이 가능하다면, 나는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슬램덩크에서 배웠다”라고까지 말한다. 2007년 펴낸 에세이 <풍선>에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만화 슬램덩크 속 인물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농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즐기고 있다는 것.” 이는 글 쓰는 게 좋아 소설가로 등단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글을 ‘일감’으로 느끼게 된 정 작가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오 년 전, 그때의 당선 소감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테다’라고 썼었는데. ‘마음껏 상상하고 목청껏 지저귀겠다’고 썼었는데. 간절했던 그 왼손의 자세를, 내가 정한 나의 원칙을, 나는 지금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가.”
국내에서 수십 권의 책을 낸 사이토 다카시 일본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63)는 2017년 <한 줄 내공>이란 책에서 “마지막까지…희망을 버려선 안 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를 인생의 문장 중 하나로 꼽는다. 슬램덩크에서 경기를 포기하려는 중학생 정대만에게 안 선생님이 해주는 말이다.
사이토 교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수재다. 사법시험에 실패하고 교육자로 진로를 바꿨다. 8년간의 기약 없는 시간강사 시절, 큰 병을 앓던 시절을 버티게 해준 한 줄의 문장을 모아 이 책을 냈다. 그는 “농구를 좋아하는 동네 중학생들에게 슬램덩크를 소개받고는 읽기 시작했다”며 “그다음부터는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했고, 심지어는 <슬램덩크 우정론>이란 책까지 썼다”고 했다.
“슬램덩크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일반인 23명이 함께 쓴 <슬램덩크 인생특강>이란 책도 있다. 대학생부터 파워블로거, 농구팀 감독, 변호사, 대기업 연구원, 스타트업 대표 등 면면은 다르지만 모두 슬램덩크를 ‘최고의 자기계발서이자 인생의 바이블’로 여긴다.
미국 변호사 정웅섭 씨(47)는 법을 공부한 적도, 외국에선 산 적도 없는 자신이 미국 로스쿨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건 슬램덩크의 신준섭 덕분이라고 털어놓는다. 신준섭은 채치수처럼 크고 강한 몸을 가진 것도, 강백호처럼 괴물 같은 운동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대신 특정 포지션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 매일 500개씩 공을 던지는 연습을 통해 주전 선수로 거듭났다. 정씨는 “신준섭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했다.
슬램덩크는 왜 이렇게 인기일까. 농구해설가 손대범(43)은 2019년 펴낸 <농구 좋아하세요?>에서 “그 안에 담긴 건 농구만이 아니다”며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더 좋은 선수, 더 좋은 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고 했다.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57)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이유로 든다. 그는 2018년 펴낸 <하드보일드 만화방>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성격 묘사는 무척 치밀해서 10여 권을 지나면 인물들에 대한 전체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며 “슬램덩크 팬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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