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우리 은행 산업의 과점의 폐해가 크다”며 은행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은행과 비슷하게 인허가 산업인 통신산업에 대해서도 경쟁 촉진 대책을 함께 주문했지만, 은행처럼 “폐해가 크다”고 직격하지는 않았다.
① 물가 대책 보고하자 은행 과점 폐해 ‘콕’ 집어 비판
이날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보고한 민생 대책에서 은행권 과점 해소를 위한 정부 제도 개선책은 가장 마지막에 ‘살짝’ 포함됐다. 민·관·학계가 함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올 상반기 개선 방안을 내겠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날 참석한 장관급 인사들에게 은행 산업 과점 폐해를 해소할 구체적 방안에 대해 의견을 물어봤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30일 금융위 업무보고에선 “은행의 지배구조에 정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관치의 문제가 아니다”며 은행권 최고경영자(CEO) 선임 절차 개선을 촉구했다. 지난 13일엔 수석비서관급 회의에선 “‘은행의 돈 잔치’로 국민의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관련 대책을 마련하라”고 거칠게 비판했다.
은행권을 향한 윤 대통령의 이런 비판은 이례적이다. 윤 대통령은 2021년 검찰총장직을 그만두고 정치권에 뛰어든 이후 시중은행 과점체제에 대해선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이런 은행권 비판 발언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공정한 거래 질서를 바로잡고 경쟁을 촉진해야한다는 생각은 윤 대통령의 경제 철학이자 소신”이라며 “은행 산업 내막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훤히 알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금융 관련 비리를 다수 수사하면서 은행권 생태계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2006년 대검 중수부 시절 외환은행 헐값 매각 혐의로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 등을 수사했다. 2011년 대검 중수부가 부산저축은행 사건을 수사할 당시 중수 2과장으로 주임 검사를 맡았다.
현대차그룹 비자금 사건 등 대기업 관련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정·관·계 인사들과 복잡하게 얽힌 은행권 생리를 들여다봤다고 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은 자칭타칭 공정 거래 수사의 최고 전문가”라며 “은행권의 경쟁 촉진 문제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② “5대 과점은행은 금융 기득권”
대통령실 안팎에선 “윤 대통령이 대형 시중은행 경영진과 노조를 개혁해야 할 기득권 세력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흘러나온다. 시중은행 과점 체제가 굳어지면서 은행 경영진이 손쉽게 연임을 하는 대신 노조는 임금과 복리후생을 챙긴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사실상 무산시킨 이면엔 이런 윤 대통령의 인식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설이다. 윤 대통령은 특히 은행 경영진과 사외이사들이 공생하면서 경영진이 사실상 ‘셀프 연임’을 하고 있는 현행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생각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민간 기업 인사에 대해선 은행·통신 등 인허가 산업일지라도 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강하다는 전언이다. 이전 정부처럼 원하는 사람을 ‘콕’ 집어 낙하산으로 내려보내지 않겠다는 의미다.
최근 회장 공모 단계에서 대통령실이 밀었다고 알려진 임종룡 우리금융지주 회장 내정자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인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여권 내부에서 임 회장에 대한 가부가 극명하게 갈린 것으로 전해졌다.
기득권 개혁은 윤석열 정부의 주요 개혁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개혁 과정에서도 민노총을 기득권 세력으로 몰면서 “기득권과 타협하면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연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기득권 개혁 의지는 국정 지지율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은행과 통신 과점 체제 해소를 국정 주요 이슈로 끌어올린 것은 사실상 대통령의 개인기”라고 분석했다. 참모들이 제시한 여러 선택지 답안 중 하나인 은행·통신 과점을 주요 국정 이슈로 단번에 끌어올린 건 윤 대통령이라는 설명이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은행과 통신 과점 체제를 비판한 윤 대통령 발언 이후 국정 지지도가 올라간 것에 대해서도 놀라는 분위기다. 한 관계자는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모두 표 때문에 주저하는 기득권 개혁을 과감하게 몰아부치는 게 윤 대통령 강점”며 “정치감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③ 모피아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
윤 대통령이 은행 생태계와 사실상 공존하고 있는 관료 조직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은행 산업의 경우 모피아(재무부와 마피와 합성어)로 대변되는 금융 관료들이 은행 과점 생태계를 묵인하는 대가로 퇴직 후 일자리를 챙긴다는 것이다. 검사 출신 윤 대통령 참모들이 주로 이런 의견을 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금감원장에 검사 출신인 이복현을 앉힌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다.
차관급인 이복현 원장은 지난 15일 비상경제민생회의 참석멤버가 아니었지만, 대통령 지시로 행사 전날 밤 참석이 결정됐다. 은행권 구조 개혁이나 경쟁 촉진을 위한 제도 개혁은 금융위원회 소관 업무인데도, 윤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이 원장에게 의견을 구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미국 등 선진국과 비교해 여전히 후진적인 금융감독 시스템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있다. 1998년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업무을 통합해 출범한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와 금감원) 체제 이후에도 금융산업은 여전히 선진화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관료와 학자 출신들이 돌아가면서 금융수장을 맡았던 지난 20년동안 금융권에 어떤 발전이 있었느냐”고 했다.
다만 윤 대통령은 모피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우수한 관료집단”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론스타와 삼성, 현대차그룹 등을 수사할 당시 상당수 모피아도 조사했지만 개인 비리 등을 거의 찾을 수 없었던 경험 때문이다.
윤 대통령 최측근인 최상목 경제수석도 박근혜 국정농단 당시 강도 높게 수사를 받았지만, 검찰은 기소도 하지 않았다. 한덕수 국무총리,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대기 비서실장 등 윤석열 정부 주요 고위 인사 중 모피아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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